No, 22
2007/12/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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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제3절 남북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김상신 칼럼-역사로 배우는 미국>

제4장

3절 남북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남부의 11개주가 탈퇴하여 '아메리카 연맹 국가'(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수립한 다음달인 1861년 3월 4일 남부에서 침투한 자객이 잡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아브라함 링컨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물론 남부의 탈퇴주장은 문제가 생길때마다 제기되어 왔지만 양쪽에서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것인데 결국은 현실로 나타나게 된것이지요.

왜 남부의 여러주들이 미 합중국에서 탈퇴하였나?

물론 노예제도의 존속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강력하게 원했던 남부의 여러주들이 이전의 대통령 후보들과는 달리 '노예해방'의 기치를 분명히 내세운 아브라함 링컨이 북부의 강력한 지원하에 대통령에 당선되자 '합중국'안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서둘러 그의 취임 전에 탈퇴하였다는 것이 모범 답안이기는 합니다만 역사적 사건이란 원래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복합적 원인들이 얼키어서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처음 13개주가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포할때만 해도 남부는 북부에 꿀릴것이 없었고 어쩌면 대농장들이 있어 경제적으로는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정치, 산업, 금융, 제조등에서 밀리게 되면서 남부의 생활양식(노예제도)이 의회를 통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가 수적으로 압도적인 남부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면 흑인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것이라는 우려 가운데 노예해방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합중국에서 탈퇴하는 것이라는 것이 남부 상류층 백인들의 생각이였습니다.

인간의 본성가운데는 강자가 약자를 장악하려는 욕구와 함께 약자는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과 같이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자의 선택은 극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노예해방'문제를 "노예가 될것이냐? 자유인으로 남을 것이냐?" "재산을 약탈해 가는데 동의할 것이냐? 아니냐"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해 할때 자존심, 독립심이 강하고 개인주의적이며 농토를 중요시하고 기사도의 기질까지도 가지고 있는 남부인들로서는 마지막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든 것입니다. 제퍼슨 데이빋(Jefferson David) 같은 사람은 "노예해방은 자유, 재산, 명예의 포기를 의미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남부의 여러 주들이 탈퇴를 선언하였을때 그들대로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굳이 그 많은 대가를 치르며 전쟁을 할 필요까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들의 탈퇴를 허용한다는 것은 미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의해 건립된 '미합중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킨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공산품의 자료의 주 공급원인 남부의 탈퇴는 경제적으로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남북의 산업이 서로 보완하는 가운데 경제적인 급성장을 구가해 온 아메리칸들에게 남북의 분리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였든 것입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부의 대부분의 일반인들의 생각은 남부의 탈퇴를 막으면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양립되기는 어렵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사는 주에서 '노예'들을 보는것을 원치 않으면서 남부에서는 자체적으로 '노예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들의 생각이였고 한편으로 북부의 사업가들에게는 남부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남부의 여러주들을 잡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Civil War'(직역하면 내란) 이라고 부르는 전쟁이 한국에서는 '남북전쟁'으로 불리고 있으며 저도 지금까지 '남북전쟁'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남북전쟁'은 잘못된 것입니다. 남부에 있는 주들이 다 똘똘 뭉쳐서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그 주민들이 한결같이 노예해방을 반대한 것이 아니며 州의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power)을 확보한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이 뫃여 국가를 선포한것이 Confederate 였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Union과 Confederate 의 전쟁이라고 부르고 합중국 정부가 승리한 마당에서 그것은 '내란'이라고 보는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들의 머리에 새겨진 '남북전쟁'이라는 개념때문에 도리어 정확하게 부른다는 것이 혼동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상황에 따라 적당히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860년도의 남북의 상황비교

유니온(북)
*23개주가 참가(그중에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미주리,켙터키, 데라웨어,매리랜드와 7개 지역이 속해 있고 서부 버지니아도 1863년에 참가)
*인구는 2천2백만(징집적령기의 남자가 4백만)
*경제상황: 10만개의 공장
백만명 이상의 노동자
2만 마일의 철로(미 전역의 70%)
1억 8천9백만불의 은행예금(전 미주의 81%)
5천6백만불어치의 금괘

콘페더라시(남)
*11개주가 참가
*9백만(3백5십만이 노예, 징집 적령기 남자 1백2십만)
*경제상황: 10만명의 노동자
9천마일의 철도
4천7백만불의 은행예금
2천 7백만불어치의 금괘

이외에도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한 목화생산 만큼은 남부가 절대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농산물과 사육하는 가축에 있어서는 북부가 남부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전쟁물자나 배들을 동원하기에 편리한 많은 수단들을 가지고 있던데 반해 남부는 직접 사거나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였으나 강력한 북부의 해군력에 봉쇄되어 여의치 않은 상황이였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가운데서도 4년동안 전쟁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미 합중국의 군대가 주로 남부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북부에서는 산업화와 함께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공장으로 몰리는데 반해 노동력을 노예들에게 의존하는 남부에서는 젊은이들이 군대를 선호하였고 인디안들과의 전쟁이 잦았던 남부나 변방지역에서는 정착된 북부보다 군대가 더욱 필요하였기 때문에 독립전쟁 이후 계속해서 많은 백인 젊은이들이 군대에 참가, 남북전쟁 당시 유능한 지휘관들과 사병들 가운데는 남부출신들이 다수였는데 이들이 전쟁이 나자 합중국(Union) 군대에서 빠져나가 연맹군(Con.)에 합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북부의 군대는 도시에서 징집되온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이민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로 영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왜 유니온을 지켜야 하는지, 왜 노예제도를 없애야 하는지 전쟁의 목적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는 것입니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거기에다 명령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북군과 잘 훈련된 군대와 유능한 지휘자를 가지고 있는 남군이기에 잔쟁 초기에 남군은 분명히 유리한 고지에 있었으며 거기에다 전쟁이 주로 남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홈팀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전개과정

아브라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주일만인 3월 11일 남부의 연방국가는(Con) 합중국(Union) 과는 다른 자체 헌법을 채택하였는데 그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모든 주들은 자체의 주권과 독립성을 가진다"고 하여 보다 완전한 연합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주들의 '영원한 연방'을 지향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으며 건국조상들이 헌법을 만들때 넣지 않기로 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문구를 넣어 국가의 우월성을 선점하려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대통령의 4년제 무제한 출마를 허용한 합중국의 헌법과는 달리 6년제 단임만을 허용하기로 하였으며 셋째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합중국의 헌법은 노예문제를 다루면서 용어에서부터 무척 조심스러웠든데(예를 들면 노예를 '봉사를 위해 억류되어 있는 사람들;persons held in service')로 표현한데 반해서 '노예(slavery)'란 용어를 자유로 쓰면서 노예에 관한 모든 제한 조항들을 삭제해 버림으로 남부의 연방국가안에서는 노예제도가 보호 받고 유지될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1861년 4월 12일 1838년 웨스트포인트를 2등으로 졸업한 Pierre G.T. Beauregard 장군이 이끄는 남 캐로라이나의 민병대가 남 캐로라이나의 촬스톤항구에 있는 미 연방 무기고를 공격 함락시킵니다. 이에 링컨대통령은 3일만에 '반란'상태임을 공식으로 선포하고 75,000명의 지원병을 소집함으로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됩니다.

문제는 5일만인 4월 17일 버지니아주가 합중국에서 탈퇴하여 연방국에 참가함으로 수도인 워싱톤 디씨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방국의 수도는 수백마일밖인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에 있었지만 링컨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버지나아주의 알링톤하잇에서 펄럭이는 '연방국 국기'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심각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링컨대통령은 버지니아 출신의 합중국 군대의 유능한 Robert E. Lee 장군에게 야전군 사령관을 맡아주도록 요청하였으나 자신의 출신州를 향해 총을 겨눌수 없다며 요청을 거부하고 남부의 '연방군'에 가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언급한것과 같이 많은 남부출신 유능한 군지휘자들이 '연방군'에 가담한 반면 북부의 지휘관들은 주로 '정치력 배려'에 의해 임명된 장성들이였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중립성'을 발표함으로 미 합중국의 외교적인 위상에 타격을 가함과 함께 남부 연방국과도 통상을 계속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합중국군대는 해상을 장악하여 군수품의 유입을 봉쇄하는데는 성공하지만 육지에서는 졸전을 면치 못하고 패퇘를 계속하는 가운데 유능한 지휘관들을 찾아내어 무능한 지휘관들을 대치하는게 초기 링컨대통령의 큰 임무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해를 넘기고1862년 4월 연방군의 수도 리치몬드를 점령하기 위한 Peninsular Campaign이라는 총공세를 펴 양측 군대는 2일동안에 20,000 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격전이 치루어 집니다. 이러한 사상자는 미 역사상 큰 전쟁이였든 독립전쟁, 1812년 인디안과의 전쟁,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에서의 사상자를 합친것 보다도 더 많은 숫자입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합중국 군대는 승기를 잡고 리치몬드 20마일 앞까지 진군하여 곧 전쟁이 끝날듯해 보였지만 링컨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하고 연방군의 사령관이 된 리장군이 지휘하는 연방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6월 25일부터 7월 2일까지의 소위 '7일 전쟁'끝에 북군이 퇴각함으로 Peninsular Campaign은 3개월만에 실패하고 말았고 링컨 취임 초기 3개월만에 전쟁을 끝낼수 있으리라던 낙관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전쟁은 3년을 더 끌게 되었습니다.

Lee 장군이 이끄는 남부 연방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니온 군대의 지휘 책임을 물어 링컨대통령은 페닌슈라 캠페인 이래 여러차례 승기를 놓친 McClellan 장군을 포토맥 지역 사령관에서 해임하였습니다. 해임된 맥크레난은 1864년에 링컨에 맞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합니다.

1863년 1월 1일 링컨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정식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합중국의 영향이 미치는 북부 지역에서는 이미 노예들이 자유롭게 되었고 노예들이 있는 남부에서는 효력을 낼 수 없었으므로 역사가들 가운데서는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실제로는 한명의 노예도 해방하지 못한 선언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해방 선언은 합중국과 연방국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하던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합중국 지원을 확실하게 하도록 명분을 제공한 반면 '합중국을 보존하여야 한다'며 전쟁에 참여하였든 북부의 백인들에게는 도리어 참전의욕을 저하시켜 지원자들의 감소를 가져와 북부에서도 '징병제'를 채택하게 됩니다.

노예해방 선언이 가져온 또 하나의 변화는 흑인들도 군인이 되어 참전할수 있도록 된 것입니다. 그전에도 독립전쟁이나 대 인디안 전쟁때 흑인들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1792년에 흑인들이 군인인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이때까지 흑인들은 참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18만 5천여명의 흑인들이 북군에 가담하여 싸웠고 많은 잡역들을 감당하여 승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 합중국에서 탈퇴하여 연방국에 참여한 버지니아와는 달리 서 버지나아(West Virginia)는1863년 6월 점차적으로 노예해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35번째 주로 합중국에 정식 가입합니다.

펜실바니아로 돌아 워싱톤 디시를 공격하려는 전략을 세운 남군의 리(Lee) 장군은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간 펜실바니아주의 게티스벌그(Gettysbur) 에서 남군 28,000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쟁끝에 패퇴하고 맙니다. 링컨대통령은 이 전투에서 남군을 섬멸하기를 원하였지만 북군 사령관이 부상당하는 바람에 리 장군은 무사히 버지니아 본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티스벌그의 승리는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랜트 장군이 이끄는 북군에 포위되어 있던 빅스벌그(Vicksburg)의 남군 29,000 명이 게티스벌그 전쟁이 끝난 다음날인 7월 4일 투항함으로 대세는 결정이 나게 된 것입니다. 남북의 가장 치열하였든 전쟁이 지나간지 5개월만인 11월 19일 전투가 있었던 곳에 전몰군인들의 묘역을 조성하고 헌납하는 자리에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the Gettysburg Address로 알려진 그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종전이 가까워 지자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은 1863년 12월 8일, 모든 연방국 소속 국민들에게 합중국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면 사면과 복권을 허용한다는 사면령을 선언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1864년 3월 10일 그랜트 장군을 합중국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5월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10만의 북군이 리 장군이 지휘하는 버지니아의 남군을 총 공격하여 한달여의 치열한 전투끝에 6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야 남군의 전의를 짤라 버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부 여러주에서의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전쟁으로 시작된 링컨 대통령의 4년 임기가 끝나가면서 1864년 11월 8일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습니다. 후보로는 재선을 노리는 링컨과 링컨에 의해 군사령관에서 해임된 John C. Fremont 와 George McClellan이 출마하였으나 흐레몬트는 중간에 사퇴하고 맥크레란과의 결선에서 링컨은 쉽게 재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3월 4일 두번째 임기의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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