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2년 12월>

소나기 인연

장동의 약주름 노인은 홀아비로 늙어 자식도 집도 없이 약국을 돌아다니며 숙식하였다.

4월 어느 날 영조가 육상궁에 거동을 하는데, 마침 소나기가 퍼부어 개천물이 넘쳐 흘렀다. 구경 나온 사람들이 약국집으로 비를 피해 몰려들어 마루 앞 처마 밑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약주름 노인이 방 안에 있다가 문득 말머리를 꺼내었다.
“오늘 비가 내 소시적 새재를 넘을 때 비 같구먼.”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을 받았다.
“아니, 비도 고금(古今)이 있소?”
“그때 내가 좀 우스운 일이 있어서 항상 잊히질 않습니다.”
“거, 이야기 들어 봅시다.”

약주름 노인이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그때 외황련(倭黃連)이 서울의 약국에 동이 났던고로 동래에 가서 사오려고 겨우 진점을 지나 무인지경에서 오늘같은 소나기를 만났는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허둥지둥 비 피할 곳을 찾다가 마침 산기슭에 초막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초막에 웬 과년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우선 비에 젖은 옷을 벗어서 물을 짜는데 처녀가 곁에 있으면서 피하지 않았습니다. 홀연 마음이 동하여 상관을 하였는데 처녀도 별로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비가 멎어서 나는 그 처녀가 사는 곳도 물어 보지 못하고 그만 훌쩍 나와 버렸답니다. 오늘 비가 영락 그날의 비 같아서 그리 말한것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처마 밑으로부터 한 총각이 마루로 올라서서 물었다.
“아까 새재 비 말씀한 양반이 뉘신가요?”

곁에 사람이 약주름 노인을 가리키자 총각은 그 노인 앞에 넙죽 절을 하였다.
“오늘 매우 다행하게도 부친을 상봉합니다.”

곁에 허다한 사람들이 모두 어리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주름 노인도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저의 부친은 몸에 표가 있다고 합니다. 잠깐 옷을 좀 벗어 보십시오.”

약주름 노인이 옷을 벗었다. 총각이 허리 아래를 보더니 서슴없이 말하였다.
“정말 저의 부친이십니다.
좌중의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무슨 까닭인지 들어보세.”
“저의 모친이 처녀 적에 초막을 지키고 계시다가 우연히 빗속의 행인을 보신 이후로 태기가 있어 저를 낳았답니다. 소자가 자라서 말을 배우매 다른 아이들은 아비가 있어 부르는데 소자는 부를 아버지가 안 계심을 이상하게 여기고 모친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모친 말씀이 아까 부친의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부친과 인연을 맺을 적에 얼핏 보니 왼편 볼기에 검정 사마귀가 하나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소자는 모친의 말씀을 듣고 12세 때부터 부친을 찾으러 집을 떠나 팔도를 돌다녔습니다. 서울만도 세 차례 들렀습니다. 이제 6년 만에 다행히 부친을 뵈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자기 부친을 향하여 말하였다.
“아버지, 서울에 계속 머물러 계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소자와 함께 시골로 가셨으면 합니다. 소자가 힘껏 농사를 지어 봉양하겠습니다. 모친은 수절하고 외갓집도 가난하지 않아서 조석걱정은 없을듯 하옵니다.”

좌중의 사람들은 이를 보고 아주 기특한 일이라고 했다. 약국 주인도 안에서 말을 전해 듣고 나와,
“아무가 아들을 찾았다지. 세상에 이런 희한하고 경사스런 일이 있겠나. 친지들의 마음도 기쁨이 솟는데 당사자의 심정이야 오죽할까.”하며 아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갈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약주름 노인은 기쁘기가 끝이 없었지만 오래 살아 온 서울을 졸지에 떠나자니 서운한 마음이 없지도 않커니와 노자가 걱정이 되었다.
“걱정마십시오. 소자의 수중에 약간의 돈이 있습니다.”

죄중의 사람들도 모두 아들을 따라갈 것을 권하면서 주머니를 털어서 다섯, 여섯 냥이 되는 돈으로 도와 주었다. 이에 약국 주인도 십여 냥을 내놓았다.

비가 갠 후 여러 사람들과 작별하고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약주름 노인은 집이 생기고, 아내가 생기고, 자식도 생기고, 먹을 것도 생겨,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자료의 원문은 조선 후기(19세기)에 편찬된 <청구야담 권4>에 실려 있으며 번역문은 이우성, 임영택의 <이조한문단편집(일조각 1978)>에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