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7
2008/8/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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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50년대의 미국-공산당 색출작업과 냉전에 휩싸인 미국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8월>

제7장 공산당 색출작전과 냉전에 휩싸인 미국 -50년대의 미국

제1절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냉전의 시작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외에 파견되었던 수백만의 젊은들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승전국의 자랑스러운 승전군으로 돌아 오자 미국의 시사잡지인 TIME지는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를 선언하였습니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장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때 와는 달리 세계 제1의 국가로서의 자부심과 생동감이 넘쳐났습니다. 새로운 엔터테인멘트로 선을 보인 TV가 1950년까지 500만대나 보급되었으며 보다 쾌적한 생활환경을 찾아 도시에서 서버브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주택의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베이비 부머들이 태어나기 시작했고 그에 편승하여 스포크 박사의 ‘육아법’(Baby and Child Care)과 놀만 빈센트 펄의 ‘적극적 사고의 힘’(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 생활의 길잡이로 널리 읽혀졌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외국에 대한 관심을 끄고 우리나 잘 살아 보자던 1차 대전 이후의 고립주의와는 달리 전후 유럽 복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종전과 함께 소련과의 협력체제가 갑자기 경쟁체제로 바뀐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만 세계 제1의 국가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크게 작용하였던 듯 합니다.

냉전의 시작과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차단조치들?

소련의 스탈린과 미국의 루즈벨트 사이에 어렵게 이루어 졌든 협력체제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은 종전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양국의 경쟁체제로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얄타 회담에서 동 유럽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획득한 소련은 1947년에는 그리스와 터키에도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공작을 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공산주의 정권이 본토를 장악하도록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공산주의의 세계화의 음모로 간주한 트루만 대통령은 의회에 “소수의 폭력이나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항거하는 국민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며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트루만 독트린으로 알려진 이 원조정책은 소련의 압력이 있는 지역은 어디든지 미국의 힘으로 미리 봉쇄해 버린다는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20여 년 이상을 계속되어 온 냉전시대의 미국전략으로 사용되었으며 국내와 국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트루만 독트린으로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고 미국의 우방으로 묶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데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은 서부 유럽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1949년 조직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Marshall Plan 으로 전후 피폐한 유럽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큰 몱을 하였습니다.

마살계획이란 당시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이 향후 4년 동안에 1억 2천만불을 서부 유럽의 전쟁 피해 국가들에게 지원하는 것과 30만명의 유럽인들(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유대인들)을 미국에 이주토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전후 유럽경제부흥 계획으로 공산세력의 경제적 침투를 방어하는데 성공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물론 순순한 인도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본주의를 확장하여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넓히려는 생각에서 나온 냉전시대의 미끼였을 뿐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피페된 유럽의 경제를 건강하게 회복시키고 민주주의적인 시장경제가 꽃피게 하여 결국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미 국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색출, 추방조치들

해외 특히 유럽에서의 공산세력 확산에 대한 경계와 함께 미국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공산주의자 색출 움직임이 증가되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든 것은 아니지만 2차 대전 이후 스탈린의 지도아래 세계 제2의 강국으로 부상하여 미국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은 보통이 아니엇습니다. 따라서 정계와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反 빨갱이 무드’(anti-Red) 가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밀려 트루만 대통령은 1947년 연방정부안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조사, 감시하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수천명의 직원들을 조사할 정도였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두 개의 스파이 사건이 미국사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는 한때 공산당원이엿으나 개심한 당시 TIME 잡지의 편집인인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1901-61) 가 1949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뉴 딜 정책을 수행하였고 전후에는 UN을 창설할 때 사무총장으로 활약한 히스(Alger Hiss,1904-96)를 공산당원이요 소련의 고위 스파이라고 폭로한 것입니다. 히스를 아는 고위 당직자들에게는 당치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체임버스는 계속 각종 증거물들을 제시하고 자유주의자였던 히스를 좋아하지 않았던 보수주의자 리차드 닉슨이 집요하게 히스의 혐의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첩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고 위증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명예와 지위가 무너져 버린 것은 물론입니다. 과연 그가 간첩이었느냐, 아니냐는 그 후 냉전이 끝날 때 까지도 심심찮게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무죄를,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유죄를 확신하는데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은 로젠버그(Julius and Ethel Rosenberg) 부부가 간첩협의로 1953년 6월 19일 사형이 집행된 사건입니다. 2차 대전 중 콜롬비아 대학과 로스 알머스(Los Almos) 연구소에서 원자탄 개발계획(Manhattan Project)를 이끌어 온 독일 태생 물리학자 Klaus Fuchs 가 원자탄 제조기술을 러시아에 넘겼으며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로젠버그 부부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연루자들은 징역형으로 끝났으나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국내적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에 달하여 희생양을 요구하던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간첩행위를 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았다고 것이 많은 역사가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미국사회를 공산주의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간 것은 매카디이즘 열풍(McCarthyism)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46년에 위스칸신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맥카디(Joseph McCarthy,1909-57)는 경력위조, 상대방에 대한 명예훼손, 로비스트로부터의 금품 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워싱톤에서의 정치생명이 한계에 다 달았습니다. 그는 무언가 한 건을 하여야만 정치적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뜨겁게 달아 오른 반(反) 공산주의 정서를 이용하여 정부기관 안에 있는 적색(赤色)분자들을 적발, 추방하는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국무성안에 스파이 조직에 연관되어 있는 공산당원들이 있으며 그들의 명단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상원 조사위원회가 조사를 하였지만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폐기하여 버렸는데도 맥카디는 계속하여 폭로하였고 그 숫자도 점점 늘어갔습니다. 사실여부에 관계 없이 맥카디의 무책임한 폭로만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1950년 당시 매카디이즘은 용감하게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애국적인 행위로 언론과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카디는 자신의 폭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필요하면 음모도 꾸미면서 근거 없는 비난으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방법을 구사하여 걸렸다 하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며 오직 고백만이 있을 뿐 이였습니다. 한번 맥카디의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에 오르면 사회명사건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몰락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맥카디는 와싱톤 정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떠올랐고 매카디의 명단에 들까봐 전전긍긍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4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맥카디가 국방성의 공산분자들을 숙청한다며 폭로한 것이 결국 군 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 의해 근거 없는 음모임이 밝혀지면서 그 동안의 조작행보가 동료들의 폭로로 밝혀졌고 대중의 지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듯 하던 그의 위세는 사라지고 한낮 술주정뱅이로 전락, 알코올 중독자로 건강상의 문제로 1957년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맥카디이즘’은 ‘공포분위기의 극단적인 반공운동으로서 적색분자 색출, 추방 운동’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조작과 음모가 곁들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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