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0
2008/4/2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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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제국으로 대닫는 미국(요약)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4월>

제5장 제국으로 내닫는 미국 요약(서부개척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의 50여년은 미국의 성장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갑자기 영토는 확장되었으나 전쟁(남북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은 농경중심의 별로 보잘 것 없는 나라에서 산업화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강대국의 하나로 비약하는 시대였다.

*인디안 정벌 사우스 다코다의 브랙 힐스(Black Hills)라는 인디안 보호지역를 통과하던 Custer란 군인이 이끄는 일단의 백인들이 그곳에서 금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인디안들에게 그 지역에서 철수할것을 명했고 이에 그 지역의 Sioux 인디안들이 합세하여 저항하자 커스터는 250여명의 백인들을 데리고 1876년 6월 25일 Little Bighorn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그가 이끄는 백인들이 몰살을 당했다.

이 소식이 때마침 미국 독립 백 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들떠 있는 동부에 전해졌다. 그것도 '용감한 우리의 군대가 피에 굶주린 인디안들에게 무참하게 공격 당하여 장열하게 전사하였다'는 선정적인 보도로 정계와 일반시민들은 격앙하고 분노하였으며 군대는 당시 전 미 연방 군대의 절반을 투입하여 Sioux 인디안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을 Sioux 전쟁이라고 부르며 Crazy Horse, Sitting Bull , Red Cloud 등이 인디안 부족들을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였던 추장들의 이름들이다. 시욱스 인디안 토벌의 여세를 몰아 북서부에서는 Nez Perce 족, 남서부에서는 아파치 족에 대한 토벌작전도 수행하였다

이후 아메리칸 인디안들은 보호지역에서 정부 감시하에 생활하면서 1500년대 100만이 넘든 인디안들이 1900년대에는 25만명 미만으로 줄어 들었다.

*카우 보이 서부개척 열기가 고조에 달했던 때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때로는 인디안들의 공격도 물리치며 용감하게 서부 광야를 달리는 카우보이의 모습은 미국적인 영웅의 전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여기에는 선정적인 매스컴의 영향이 절대적이였다.

원래 카우보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1867년에서 1887년 사이 20여년 동안에 불과하였다. 텍사스의 남부지역에는 스페인개척자들이 들여온 소들과 영국계 정착민들이 들여온 소들이 교배하여 만들어진 Texas longhhorn steer라는 양질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그리고 철로변에는 이들을 위한 도시들이 생겨났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서부영화에 나오는 온갖 에피소드들이 일어 났든 것이다. 그러나 텍사스 카우보이들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비지니스는 미 중서부에서도 양질의 소들을 사육할 수 있게 되면서 20여년 만에 사라져 버렸지만 영화산업이 번성하면서 카우보이가 미국의 상징으로 되살아 났다..

*초기 미 자본주의의 실상 미국 자본주의를 이야기 할 때면 청교도들의 근면, 성실, 소명의식이 근간이 되었든 서구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적 바탕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후손들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지만 19세기 후반기였든 이 시대의 미국 자본주의는 과도기로 좋게만 보아 줄 수 없는 자본주의의 치부란 치부가 다 노출되었던 시대로써 미국 역사가 내보이기 부끄러워 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대륙을 잇는 철도부설이 국가적인 급선무였고 그것을 위해서는 땅과 노동력과 강철과 자본이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업체들은 정치가들과 결탁하여 정부와의 수의계약에 의해 수많은 이익을 챙기는 한편 힘없는 이민자들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혹사,착취 하였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대통령들은 재벌들의 손에 휘둘리면서 제대로 정부 장악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이후 데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타날 때까지 역사가 기억하는 훌륭한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

철도등을 통해 돈을 모은 재벌들은 합병을 통해 운영권을 독점하거나 'Trust'같은 법적인 제재를 교묘하게 피하는 방법등을 통하여 막대한 돈을 긁어 모았으며 정부관료들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돈을 끌어 모았다

*흑.백 분리정책 남북전쟁의 종결로 흑인들은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였다. 기차에서는 다른 칸에 타야 했고 식당에서도 같은 방에서 먹을 수 없으며 학교도 다른 학교를 이용해야 하는 등 흑백인종간의 분리현상은 더욱 심해져 갔다

더욱이 연방 대법원은 1896년 6년이나 끈 긴 재판 끝에 흑인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주(state)는 그들을 격리 수용하는 법을 만들 수 있다"( separate but equal)는 판결을 내렸다.

영어에 Jim Crow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1830년대에 유행하였든 노래가사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는 검은 얼굴을 칠한 광대 같은 백인을 지칭하는 이름이엿든 것이 후에는 'Negro(흑인을 비하하는 명칭)'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고 19세기 말 이후 흑백 분리정책이 유행처럼 번져가면서 '흑인전용' 또는 '흑인에게는 분리정책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Jim Crow는 기차나 버스, 식당은 물론 화장실이나 공장 출입문에도 적용되었으며 뉴 올린스에서는 사창가에도 뻐젓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민상황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미대륙을 찾은 사람들과 그의 자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가 미 합중국이다. 그리고 그 후의 미국의 이민정책은 노동력의 필요여부에 따라 변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1812년 전쟁부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까지 50여년 동안에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5백만여명이였다. 1815년에 미국 인구가 7백만명이었든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이다. 이 당시 이민자들은 주로 영국과 극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던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이였다. 이 당시 얼마나 아일리시들이 많았든지 뉴욕에서는 '아일리시는 사절(No Irish Need Apply-약칭으로 NINA)라는 사인이 유행할 지경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25년 동안에 천만여명의 북 유럽인들이 이민하여 왔고 1890년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때까지 천 5백만명의 이민자들이 몰려 들었는데 그 중 3분의 1이 동부와 남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였다. 영토가 서부로, 서부로 확장되어 태평양까지 이르면서 미 대륙은 그렇게 많은 이민자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노동력이 절대 필요하였든 것이다.

*스페인과의 전쟁 영국, 독일, 프랑스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제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미국은 해외 무역시장을 장악하고 지하자원들을 확보하며 필요한 농산물들을 재배하기에 적당한(특히 담배와 설탕 등) 농토를 얻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스페인과의 싸움은 당시 스페인의 영토인 큐바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을 원하는 외부세력 못지 않게 정부안에도 전쟁을 원하는 매파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후에 대통령이 된 대오도어 루즈벨트 해군 부사령관(assistant secretary)이 있었으며 그는 친구에게 "나는 어떤 전쟁이든 환영하네, 왜냐하면 미국은 전쟁을 필요로 하니까!" 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은 큐 바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5월 1일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인 필리핀의 마닐라 항구를 공격하여 스페인 선박들을 침몰시키는 한편 게릴자 지휘관을 마닐라에 투입하고 미군을 필리핀에 파견한다. 이때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379명이었지만 전염병과 풍토병 그리고 상한 음식물 중독으로 미국인 사망자가 5,500여명니나 되었다고 한다. 이 전쟁을 통해 포로리코나 큐바는 원래 의도한대로 미국이 관장하게 되었지만 태평양상의 괌이나 필리핀은 처음부터 의도했든 것이 아니어서 뚜렷한 방침이 없었는데 1898년 하와이 섬들을 장악하면서 필리핀도 미 국영으로 만들어 태평양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나마 운하와 미국 1868년 대통령에 취임한 Ulysses S. Grant 대통령은 중앙 아메리카 지역에 운하건설을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미국의 어떤 회사는 중앙 아메리카에 철도를 부설하여 승객들을 운반함으로 항해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막상 시작을 못하고 있던 1880년 수에즈 운하를 설계한 Ferdinand de Lesseps를 중심으로 일단의 유럽게 백인들의 발 빠른 행보에 기분이 상한 미국은 Hayes대통령을 통하여 유럽의 나라가 아메리카 대륙의 운하를 통제할 수 없으며 “미국의 정책은 운하는 반드시 미국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콜롬비아가 장애물이라면 그 지역에 말을 잘 들을 새 나라를 만들면 된다며 1903년 파나마 주민들의 반란을 선동하고 미국함대를 파견하여 파나마란 새 나라를 건립하게하였다.

이 공사를 맡은 민간 업자가 두 손 들자 군대를 동원 강행 끝에 1914년 완공을 보았는데 McKinley 대통령에 의해 계획되어서 Roosevelt 와 Taft대통령에 의해 추진되어 온 공사는 Woodrow Wilson 대통령에 와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공사 완성의 기쁨은 잠시,유럽 대륙에서 감도는 제1차 대전의 전운으로 인해 크게 준비하였든 축하행사마저 취소하게 되었다.

*데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의 26대 대통령으로 봉직한 데오 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는 와싱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들과 함께 Rushmore산에 조각 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는 인기 있고 미국 정치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악관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정부기관에 젊은이들을 기용하여 부정, 부패를 최소화 하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기업주들의 입장을 지지하며 그들에게 유리한 제도를 허용하며 그들에게 끌려가던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달리 정부안의 부정,부패를 제거하고 자본주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들을 개혁(반 Trust 법 제정 등)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고용주들이 양보하도록 유도하였다.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렇게 강력하게 권한을 휘두르며 정치를 한다고 하여 그를 “big stick”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big stick’은 외교정책에서도 예외 없이 휘둘려졌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지지하고 큐 바 침공을 직접 지휘한 것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의 문제에는 유럽의 국가들이 관여하지 말라는 몬로 정책을 다시 확인하면서 미국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역에서 잘못된 또는 옳지 못한 일이 발생할 때는 미국이 경찰국가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부정 부패와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극단적인 빈부 격차 가운데서 무기력해지던 미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자본주의에 새바람을 일으키면서 국제적인 제국으로 발 돋음 하는데 루즈벨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았으며 미국사람들은 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랑 하는 듯 하다.

*사회의식의 변화 <언론, 사회주의, 루즈벨트와 윌슨)
이미 언급한대로 미국인들은 중요한 고비마다 출판물에 의하여 고무되고, 새로운 추진력을 공급받았다

19세기 후반에 와서도 마크 트웨인이나 워너(Warner)같은 작가들이 소설을 통하여 비참한 사회상등을 폭로하는가 하면 남북전쟁 후 신문기업들이 크게 성장하면서 선동적인 기사들로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Lincoln Steffens 나 Upton Sinclair 같은 젊은 기자들이 당시 새로이 창간된 McClure나 Atlantic Monthly와 같은 잡지들을 통해 뇌물행위와 부패상등을 끈질기게 폭로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조류가 되어 소설로도 많이 출판되어 나왔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도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주의 바람이 일었다. Morgan이나 Rockefeller 같은 기업을 통해 별 혜택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에게는 부(富)는 개인기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통제를 통해서 분배되어야 한다는 사회주의가 그럴듯하게 들렸고 정치적 힘을 더해갔든 것이다.

이들은 보수적이며 백인 중심의 노동단체인 AFL과는 달리 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란 단체를 조직하여 각종 탄압에도 줄기차게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사회당(Socialist Party)이라는 정당까지 만들고 한때는 대통령 후보를 출마시켜 6%의 득표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드리워 지면서 반 공산주의 정서가 커져 갔고 미국 사회당이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하였다 하여 미국인들의 마음에는 “사회주의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자리함과 함께 사회주의는 아메리칸의 정치와 생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1914년 6월 22일 오스트리아 황실의 황태자 Francis Ferdinand 가 사라에보 에서 암살당함으로 세계의 모든 강대국들이 전쟁에 휩싸이는 큰 전쟁이 촉발되었다. 당시에는 큰 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든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구별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유럽에서는 긴장이 고조되면서 다투어 군사력을 강화하였는데 거기에는 산업혁명과 함께 발명된 새로운 무기들이 많이 있었다. 독가스, U 보트, 화염방사기, 탱크, 발달된 수류탄과 기관총 등이 그것들이다.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 산업의 입김도 크게 작용하였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국제적인 긴장은 군수업자들에게는 돈 버는 큰 기회였던 것이다. 이 ‘큰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데에는 말 타고 기사도를 발휘하면서 하든 전쟁과는 사상 유례가 없던 대량살상무기가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큰 전쟁’의원인은 중요한 富의 자원을 소장하고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지를 누가 장악하느냐 는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1915년 5월, 미국의 신문에는 ‘미국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널 때 영국 국적 선박을 피하라’는 와싱톤 주재 독일 대사관의 경고 광고가 계재되었다. 그 경고가 나간 지 1주일도 안되어 영국선박 Lusitania 호가 아일랜드 근해에서 독일 U 보트의 어뢰정을 맞고 침몰하여 1,959명 승객 중 1,200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 미국인이 128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일과 미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고 1916년 재선을 앞둔 윌슨 대통령은 ‘중립’정책을 고수하면서 선거운동때도 “전쟁에 개입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대통령’으로 부각시켜 재선에 성공 하였다.

그러나 1917년 2월 독일이 군함과 상선을 가리지 않고 미국적 선박도 예외 없이 무차별 공격을 가하자 윌슨 대통령은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때를 같이해서 독일이 미국과 멕시코간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Zimmermann Telegram 사건이 터진다.

독일은 윌슨의 14개 조항에 근거한 평화안을 받아들이고 종전회담을 통하여 1918년 11월 11일 11시를 기해 모든 작전을 종결한다는 휴전 안에 서명함으로 4년 반을 끌어 온 ‘큰 전쟁’이 끝나게 된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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