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5년 1월>

눈 - 김 수 영(1921-1968)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최영미의 한마디 - 신동엽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 시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끌며 우리 시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가 김수영이다. 그의 시는 이지적이며 때로 난해한 현대시가 주류를 이루는데 ‘눈’은 초등학생인 조카아이에게 들려주어도 좋을 장난감 같다. 유일한 관념어(?) ‘폐허’가 등장하는 마지막 행만 빼면, 이해고 뭐고 할 것 없이 교실 전체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는지. ‘눈’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인 ‘폐허’에는 어린애이면서 어른이어야 하는 단순복잡한 내면이 투시되었다.

한 줄 두 줄 마치 종이 위에 눈이 내리듯 ‘내린다’와 ‘내릴까’를 엇갈려 배치해 글을 이미지로, 그림으로 만들고 있다. 낡은 듯하면서 매우 참신하며 현대적인 서정시이다. 어느 겨울날, 첫눈을 보며 동심으로 돌아가 욕심없이 눈을 굴리듯 시심을 굴려 빚은 걸작이라 하겠다.

시인 최영미의 <내가 사랑하는 시(해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