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문화마당/2012년 7월>

김현과 호랑이 처녀

신라 청년 김현이 탑놀이를 하다 처녀로 변한 호랑이와 정을 통한 다음, 호랑이 처녀가 희생적인 죽음을 택한 덕분에 벼슬을 하고, 죽은 호랑이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호원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다.

신랑풍속에 매년 2월이 되면 초 8일부터 15일까지 서울의 남녀들이 다투어 흥룡사의 전탑(殿塔)을 빙빙 도는 복회(福會)를 열었다.

원성왕때 김현이란 총각이 밤이 이슥하도록 쉬지 않고 홀로 탑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웬 처녀 하나가 염불을 하며 김현의 뒤를 따라 도는 것이었다. 마침내 서로 애정이 느껴져 눈짓으로 애정을 보냈다. 이윽고 탑돌이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 둘은 정을 통했다. 처녀가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 나섰다. 처녀는 그러지 말라고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우기며 따라갔다. 처녀는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로 들어갔다. 거기에 웬 노파 하나가 있다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은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노파가 말했다.
“비록 좋은 일이긴 하나 차라리 안 한것만 못하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어쩔 수가 없구나. 한쪽 구석에다 잘 숨겨라. 네 형제들이 해칠까 두렵다.”

처녀는 김현을 끌어다가 구석진 곳에다 숨겼다. 조금 있노라니 호랑이 세마리가 으르렁거리면서 들어오더니만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안에서 비린내가 나는구나. 마침 배도 고픈데 요기하기 좋겠다.”

그러자 노파가 처녀와 함께 꾸짖었다.
“네놈들 코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무슨 미친 소리냐?”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였다.
“너희들이 즐겨 많은 생명을 해치고 있도다. 이제 마땅히 한 놈을 죽여 그 악을 징계하리라.”

세 호랑이는 그 소리를 듣자 모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말했다.

“세 분오빠들이 멀리로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기만 하겠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겠어요.”
이 말을 듣고 세 호랑이는 모두 기뻐하며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치다가 도망쳐 버렸다. 처녀는 김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처음에 저는 도련님께서 저희 집에 오시는 게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시지 말라고 사양하고 말렸던 거예요. 하지만 이제 모든게 드러나 버렸으니, 진심을 털어놓겠어요. 더구나 이 몸이 낭군과 그 종류는 다르나 하루 저녁을 즐거히 모셨으니 우리는 부부의 의를 맺은 사이입니다. 이제 하늘이 제 오빠들의 죄악을 미워하시니, 저희 가족에게 미칠 재앙을 제가 대신 감당하고자 합니다. 이왕 죽을 몸이라면 아무 상관도 없는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도련님의 칼 아래 죽어 그 은덕을 갚고 싶습니다. 제가 내일 시장에 들어가 마구 사람을 해치면 아무도 제게 손댈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임금께서 높은 벼슬을 걸어 사람을 모집해 저를 잡도록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쫒아 성 북쪽 숲 속까지 오세요. 거기서 제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정을 통하는 것은 인륜에 떳떳한 일이지만 다른 종류와 관계 맺는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일이요. 하지만 이미 조용히 만나 즐겁게 지냈으니 이 또한 진실로 하늘이 주신 큰 행운이오. 그러니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세상의 벼슬을 바란단 말이오?”

“도련님, 그런 말씀일랑 마세요. 이제 제가 일찍 죽음은 하늘의 명령이며 제 소원입니다. 아울러 그것은 도련님의 경사요, 저희 가족의 복이며, 나라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번 죽음으로써 이렇게 다섯가지 유익이 생기는데 어찌 이것을 피한단 말입니까? 다만 저를 위해 절을 세우고 불경을 강독하여 좋은 업보를 얻도록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도련님의 은혜는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을 거예요.”

이리하여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아닌게 아니라 사나운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와 사람들을 심하게 해치고 다니니 아무도 감히 당해날 수가 없었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영을 내려 말했다.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는 2급 벼슬을 주겠노라.”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제가 해낼 수 있습니다.”

왕은 벼슬부터 내려 김현을 격려했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 속으로 들어가자, 호랑이는 처녀로 변하여 반가히 웃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어젯밤 우리가 나눈 은밀한 사랑의 일, 아무쪼록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오늘 제 발톱에 다친 사람들은 흥륜사의 장을 바르고 나팔소리를 들려주면 다 나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처녀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잡고서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졌는데 곧 한 마리의 호랑이였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외쳤다.

“이제 막 호랑이를 쉽사리 잡았다.”

그러나 그 사유는 숨긴 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호랑이 처녀가 일러준 대로 그날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들을 치료했더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호랑이에게 물리면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이미 벼슬하게되자 호랑이 처녀의 소원대로 서천가에 절을 짓고 이름을 호뤈사(虎願寺)라 하였다. 항상 범망경을 강독하고 호랑이의 명복을 빌어, 호랑이가 제 몸을 죽여 자신을 성공시킨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이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나간 일의 신기로움을 새삼 깊이 느껴 붓을 들어 전기를 만들었다. 그제서야 세상 사람들이 그 사정을 알게 되어 그 책 이름을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그 숲 이름이 지금까지 일컬어 온다.

*이자료의 원문은 일연이 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 권5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