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관련 논문들   ▒  

2015/10/24(토)
장준하 의 <내가 겪은 8.15 광복>  

<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장준하의 '내가 겪은 8.15 광복/2015년 8월>

장준하 의 <내가 겪은 8.15 광복>

-광복의 최전선에서 마음 졸였던 8.15 전후-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님은 1월 일본학도병으로 끌려갔으나 그 해 7월 일본군에서 탈출, 중국 대륙 6천리를 행군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에 도착, 1945년 1월 광복군에 편입되어 대위에 임관되었다. 그 해 5월 미국의 OSS(전략 첩보대) 대원이 되기 위한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OSS 특수훈련을 받은지 3개월이 지난 8월의 어느 날부터 시작된 8.15 광복을 전후한 그의 체험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 8.15 감격'과는 완전히 다른 특이한 경험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장준하 님의 <돌베개>에서 그가 겪었던 8.15 광복 부분을 뽑아 소개한다.

출동명령 대신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OSS 특수훈련을 받은지 3개월이 지난 8월의 어느 날 OSS의 도나반 장군이 출동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숙소에 찾아와서 김구 주석과 이청천 사령관, 이범석 장군과 오랫동안 회담을 계속했다.

출동명령을 기다리며 사물함을 정리하고 있던 1945년 8월 10일, 오후 한 통의 전문이 날아왔다. 그것은 출동명령이 아니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연합국에 통보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특명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이었다.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느껴야 했다. 교차되는 두 감정이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였다.

조국이 광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조국광복의 기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우리가 어이없이 기회를 잃은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쁨 뒤에 실망이, 실망 뒤에 기쁨이 서로 뒤바뀌며 가슴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 연합군의 한반도 서해안 상륙작전이 며칠만 더 먼저 이루어 졌더라면 . . .’

애석한 노릇이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안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조례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자 우리 전원은 운동장에 모였다. 조국 광복을 못 보고 죽은 동지들의 넔을 기리기 위해 엄숙한 묵념이 진행되었다. 모두들 손을 앞으로 모으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묵념은 2분, 3분, 4분 . . . . 계속되었다.

그러나 묵념이 끝났는데도 모두들 그냥 흩어질 줄을 몰랐다. 우리들은 증축공사를 하다가 중단된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OSS 막사며 교련장을 바라보며 비통해 했다. 우리는 허탈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침묵하며 밤을 샜다.

1945년 8월 13일, 일조점호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대장실로 오라는 소식이었다. 거기엔 벌써 이해평, 노능서, 김신일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에 이재현 동지가 들어 왔고, 잠시 뒤엔 노태준, 안춘생 두 구대장이 잇달아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얼마 뒤에 이범석 장군이 들어왔다.

“전원 모였는가?” 하더니 “오늘 오후에 나는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오. 여기 모인 동지들도 나와 함께 행동해 줘야겠소.”

우리가 깜짝 놀라자 이 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태준, 안춘생 두 구대장은 이 곳에 남아서 뒷일을 처리해 주시오. 오늘 아침에 임시정부에서 내게 국내 전진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겨 주었소. 중국전구 미군 사령부가 내일 서울로 사절단을 들여 보낼 것인데 우리도 그 편에 들어가라는 명령이오.”

우리는 이 일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지, 슬프게 생각하애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 그럼 각자 돌아가서 떠날 준비를 하고 12시 정각에 다시 집합하시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빼았겼던 고국 땅에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나라 땅에서 일본인들과 싸우다 한 포기 풀이 될 것을 각오했던 우리가 이제는 어였한 주인으로 고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지대장실을 나와 흩어지면서 서로 기쁨의 악수를 나누었다.

연합군 사절단 선발대의 일원으로 수송기에 올랐으나

연합군 사절단의 임무는 한국에 선발대로 들어가 연합군 포로를 인수하고 미군이 들어가기 전에 기초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오후 4시, 우리를 태운 대형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깊이 들여마셨다. 40여 분을 달린 뒤, 시안 비행장에 닿자마자 우리는 모두 차에서 뛰어내렸다.

비행장 구내 보급기지에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휴대식품을 지급 받고 우리는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또다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해가 떨어지고 자정이 지났는데도 탑승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못 들어가는 거 아냐?”

기다림에 지친 누군가가 이렇게 지껄였다. 새벽 하늘에서는 구름이 별을 가렸다가 다시 별을 드러냈다. 새벽 3시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 사절단 대표로 펄스 대령과 미군 21명이 들어섰다. 우리 측에서는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이해평 그리고 내가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미군 측 22명과 우리 측 6명 합쳐 모두 28명이나 되었다.

“이젠 정말 출발하나 봐.”

우리는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8월 14일 오전 4시 정각.

우리는 조용히 활주로를 걸어 나갔다. 새벽의 희미한 빛을 받으며 쌍발 대형 수송기 한 대가 서 있었다. 인원 점검을 마치자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육중한 기체가 천천히 움지였다. 잠시 후, 수송기는 뤼양비행장을 날아올라 후난, 신시를 거쳐 산동을 향했다.

시계가 10시 40분을 가리켰을 때 비행기는 황해의 아침 바다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행기에 부딫쳐 눈부시게 반짝였다.

비행기 안에서는 계속 쿤밍에 있는 본부와 무전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미군 무전사 한 사람이 펄스 대령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쪽지를 들여다 본 대령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서 확인하듯 다시 전문을 읽었다.

“한국 진입 중지!”

사절 대표가 큰 소리로 외치자 비행기가 곧바로 방향을 돌려 중국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도쿄 만에 진입하던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말하고도 계속 연함군을 폭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은 위험하니, 한반도 진입을 포기하라는 긴급 전문이 왔던 것이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 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저 몇 시간동안 침묵만 지켰다.

‘조국으로 돌아가기가 이렇게도 힘든 것인가.’

비행기는 신안을 떠난후 12시간 만에 다시 시안 비행장에 착륙했다.


다시 출동하라는 희소식을 기다리며 지낸 광복의 날.

1945년 8월 15일.

나는 이 광복의 첫 날을 뚜취 병영안에서 맞으며 조국의 정치적 불안을 예감했다. 동지들은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모여앉아 해방된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를 생각했다. 이 뜻깊은 광복의 날에 우리는 기쁨의 환호성조차 질러 보지 못한 채 어둠을 맞고 있었다.

그날 밤 11시. 그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던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쿤밍으로부터 온 무전 지시였다.

“다시 들어가게 될지 모르니 일단 시안 비행장에서 대기하라.”

우리는 또다시 트럭을 타고 영내를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정말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8월 16일 새벽에 시안 비행장에 닿은 우리는 구내식당 한 모퉁이에 모여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 낮, 하루 밤 그리고도 하루 낮의 기다림이었다. 우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을 기다리며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8월 17일 저녁, 식당 안으로 미군 1명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우리 인원을 두 사람 줄이고, 무기와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을 버리라고 했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능한한 비행기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범석 대장과 김신일 동지, 노능서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네명이 가기로 했다. 미군 OSS도 네 사람을 줄여서 재 조정된 일행은 22명이었다.

8월 18일 새벽 3시 30분 경, 우리는 또다시 시안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번에는 정말 조국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나는 비행기가 산동반도를 지나 황해 위를 날 때까지 내내 의심하고 있었다.

조국의 산하가 내려다 보이자 내 앞에 앉은 이 장군은 몇 번이나 눈가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조국을 떠난지 3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랴.

며칠 전, 뚜취 본대를 떠나던 날, 저녁에 나는 장군의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에 이런 글귀가 쓰여진 것을 보았다.

‘아직 구차히 목숨을 유지한 것은 나라에 보답하기 위함이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는 한강 하류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황해를 건느면서 매 5분마다 한국 내 일본군 사령부에 ‘미국 군사 사절단 진입중’이라고 계속 무전을 보냈는데 답이 안 와서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강 줄기를 따라 영등포 위에 이르러서야 일본군에서 답이 왔다.

“여의도로 내려라.”

눈아래 펼쳐진 고국의 산하

수송기 창으로 한강 줄기가 눈에 들어 왔다. 8월의 맑은 하늘 아래에 있는 조국의 나무, 길, 산, 들 . . . .

어느덧 수송기가 여의도 활주로를 향해 고도를 낮추었다. 일장기를 붙인 수많은 일본군 비행기가 창 밖으로 지나갔다. 중형 전차와 전투기들도 보였다. 주먹을 꼭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수송기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덜컹 흔들렸다. 납덩이 속을 밀치고 나가듯 비행기가 육중하게 나아가다 격납고 앞에 있는 광장에서 멎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고 숨이 탁 막혔다.

드디어 비행기의 출입문이 열렸다.

우리는 일본군과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메었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자 흩어져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도 몸을 날렸다.

일본군과의 대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방독면을 쓰고 총검을 든 일본군들이 돌격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5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격납고 앞에는 1개 중대쯤 되는 일본군 병사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 뒤에 모여 있었다. 살펴보니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듯한 자들이 한 줄로 서 있고 장성도 몇 명 서 있었다.

더구나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중형 전차와 기관포도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않았다.

우리들은 땀에 젖은 채 8월의 뜨거운 열기가 이글대고 있는 비행장 아스팔트 위에 서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 10여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들은 일본군 고급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 걸음씩 발길을 옮겼다.

“각자 흩어져서 걸어라. 조심해라.” 누군가가 나직히 말했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일본군 병사들이 의외로 포위망을 풀고 길을 열어 주었다. 일본군 육군 준장과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일본군 사령관 쇼스키 중장이었다.

잠시후 펄스 대령과 쇼스키 중장이 마주 보고 섰다. 거구의 펄즈 대령과 왜소한 일본군 장군이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보였다.

“무슨 일로 왔소”

쇼스키 중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집에 비해 퍽 야무져 보였다.

우리측 대표는 말없이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전단지를 내밀었다. 우리 연합사절단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혀 있는 전단이었다.

쇼스키 장군이 그 글을 읽고나서 말했다.

“당신들이 들어온 이유를 알겠으나, 아직 도꾜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소. 그러니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즉시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소.”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위협했다.

“우리 병사들이 꽤 흥분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소.”

그러자 우리 대표가 쇼스키 중장에게 말했다.

“일본 천황이 이미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시오? 이제부터는 도꾜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앙보하지 않았고 양측은 옥신각신하며 몇 번이나 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쇼스키는 한 부하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이르고 물러가 버렸다. 그 부하는 여의도 경비사령관인 일본군 대좌였다.

그 후에도 대좌와 우리측 대표사이에 같은 주장이 몇 차례 오가는 동안에 3시간 40여 분의 시간이 긴장 속에서 지나갔다.

그때 일본군 대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는 곧 펄즈 대령에게 다가와 도저히 흥분된 자기 병사들을 누를 길이 없으니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펄스는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본군 대좌는 포위병의 지휘자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는 일본말로 크게 소리쳤다.

“이봐, 너희들은 이쪽을 보고 경계하지 말고 밖을 향해 서서 경계하란 말야.”

지휘자는 전원 “뒤로 돌앗!’을 시키고 나서 철모를 벗고 총검을 빼라고 했다.

우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이렇게 위기가 누그러진 것이 다행스러웠다.

일본인 대좌와 펄스 대령은 우리가 돌아갈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서안까지 갈 가솔린을 보급해 달라고 하며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들은 여의도엔 C-47에 맞는 가솔린이 없으니 다음날 평양에서 날라다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일본군은 모조리 물러가고 그 대신 일본 헌병들이 우리를 경호했다. 우리 한 사람에 일본 헌병 두 놈씩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목욕물까지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이 판국에 총을 놓고 목욕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세수만 하고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노량진 철교 똑을 보니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아, 동포로구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새 해도 기울고 강바람도 불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지자 흰옷 입은 동포들의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아무라도 소리쳐 불러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헌병 놈들이 붙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고국 땅에서 그리움조차 마음껏 터트리지 못하는구나.’

저녁 구름이 생선비늘처럼 흩어져 있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강변의 포풀러가 춤을 추며 우릴 환영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숙소는 일본군 장교 집합소였다. 그곳엔 저녁식사와 함께 간단한 술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맥주 안주로 튀김과 계란부침 등이 놓여 있었다.

일본군 대좌와 그 부하가 이범석 장군에게 맥주를 권해 왔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 장군은 일본군 대좌가 권하는 맥주 한 잔을 받아 마시면서 말했다.

“그래, 있는 것 다 차린 것이 이것이니 . . . . 물자가 그렇게 부족한데 뭣 때문에 당신네 나라는 일본 국민의 희생을 계속 요구하는거요?”

“우리 군의 형편이 그렇습니다. 자 어서 술이나 드시죠.”

“그럽시다.” 장군은 그렇게 대답하고 남은 술잔을 마저 비었다.

이 날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술잔을 입에 댓다. 청교도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술, 담배를 입에 대서는 절대 안된다고 배워 왔었다. 그래서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예 술, 담배를 권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김신일 동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철 동지, 내가 특별히 한 잔만 권하겠네. 자, 일본군 대좌가 따라 주는 맥주 한 잔만 들어보구려. 중국 대륙 6천 리를 횡단하며 이를 갈았던 그 원한을 생각해서 . . . 얼마쯤은 풀어질 거요. 정말 그 고생을 생각하며 딱 한 잔만 마시구려.”

나는 눈을 감고 일본군 대좌가 따라 주는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그 맥주는 쓰디쓴 승리의 잔이었다.

그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패전의 분풀이를 하려는 몇몇 일본군 장교가 졸병들을 거느리고 술자리를 급습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관단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재빨리 문과 창문 쪽으로 붙었다.

난처해진 건 술을 권하던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밖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우리를 해치려는 군인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헌병대가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많은 헌병대가 동원되어서야 그들은 진압되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술자리는 깨지고 말았다.

밤이 깊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아 숙소로 제공된 다다미방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었다. 바로 영내만 나서면 그리운 동포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다욱 안타까웠다.

8월 19일. 날이 새고 아침이 밝아 왔다.

나는 조국의 아침 해를 향해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눈부신 햇살을 기대했으나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하늘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펄스 대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수통에 가득 물을 채우고 흙도 한 줌씩 종이봉투에 담았다. 되돌아가서 그 물과 흙을 동지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도 고국의 물을 마시고 또 마셨다.

마포 강변에서 아침 연기가 안개를 밀어내고 자욱하게 깔렸다. 남산과 삼각산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저것이 . . .”

강 건너 어느 민가로 숨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맺힌 한과 멍울진 분을 한번 풀어볼 수 있으련만.

그날 오후 3시 반쯤, 우리는 평양에서 가져왔다는 휘발유를 비행기에 넣었다. 그리고 5시에 우리는 모두 착잡한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수송기는 이륙하자마자 고도를 높였다. 일본군 전투기가 뒤따라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장준하 저 <쉽게 읽는 돌베게>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32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  686 07/29-20:33
31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773 05/22-23:24
30   장준하 의 <내가 겪은 8.15 광복>  1503 10/24-23:32
29   함석헌의 <도둑 같이 온 해방(解放)>  2043 10/09-20:23
28   김치수의 <문학작품 속의 한국전쟁>  2272 07/15-00:37
27   도산 안창호의 <민족 개조론>  2302 07/15-00:31
26   님의 시인, 한용운과 3.1 만세운동  1945 03/29-13:01
25   한국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김열규  1984 12/11-23:07
24   한국의 잔다크 유관순  2543 03/27-18:35
23   민족불멸의 왕관 세종대왕(요약)-이광린  2460 10/30-00:54

 
처음 이전 다음       목록 홈

ⓒ Copyright 1999~   TECHNOTE-TOP / TECHNOTE.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