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29(토)
님의 시인, 한용운과 3.1 만세운동  

<늘푸른나무/논설과 해설/2014년 3월>

님의 시인, 한용운과 3.1 만세운동

-그의 사상과 언어와 삶-

구 한말과 일제 강점기, 격랑의 시대를 종교인으로,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시인으로 살다 간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지방토호였던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옥(貞玉), 용운(龍雲)은 승려가 된 후에 받은 이름이며 호는 만해(萬海)다.

6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 한문지식의 기초를 닦는 한편 부친의 교육을 통해 역사상 빛나는 의인걸사들의 언행을 배우며 세상 형편과 국가, 사회의 일들을 익혔다. 10여년 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나라의 운명은 막바지를 향하여 굴러가고 있었다.

1894년 전라도를 기점으로 동학란이 터졌다. 용운은 비록 1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어진백성들의 봉기를 외면할 수 없어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여건이 형성되지 못한상태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은 불발탄이 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용운은 첫번째 시도였던 현실참여에서 쓰라린 좌절을 경험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관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강원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허드레 일들을 하는 한편 불교의 기초지식들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그러나 그는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관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산하여 걸승(乞僧)노릇을 하며 만주와 시베리야행을 강행하였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1897년에 귀향하였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속에서 사색하기를 좋아하였던 용운은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자자(勤勤孜孜)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하고 무형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나의 회의는 점점 커져갔다. 나는 이 회의때문에 머리가 끝없이 혼란해짐을 깨달았다.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한용운의 ‘서백리아에서 서울로’에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란 결론을 얻고서도 방황하던 용운에게 1905년 홍성에서 일어난 제2차 의병의 난으로 인한 부친의 죽음은 그를 승려의 길로 몰아 넣은듯 하다. 그는 1905년 백담사에 들어가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27세에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아 득도식을 올렸는데 그때까지의 생활은 불교세계를 섭렵하는 것이었으나 득도 후 그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떠나 참선을 일삼으며 고명한 법사의 강설에 귀 기울이고 오묘한 사색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완성의 길은 될지언정 속세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방법에는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속세로 내려와 무명중생들을 제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서울로 내려와서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1909년 일본에 가서 6개월간 신문명을 시찰하고 견문을 넓혔다. 일본여행중에 3.1 독립운동때에 동지가 된 최린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9년에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으며 일본에 다녀와서는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여 불교의 대중화 작업을 주도하였다. 그런 가운데 1910년 10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만주로 가서 독립군 훈련장들을 순방하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며 격려하는 일을 하면서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1913년에 귀국한 그는 1909년 집필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다시 출판하고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는 한편 불교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한용운의 불교사상은 원효대사에게서 절정을 이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승불교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후 스스로 속세의 세상에 내려와 일반 대중속에 묻혀서 불도를 널리 펴는 것이 보살의 정신이라고 믿는 것으로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승려이면서도 거침없이 독립투사로서, 혁명가로서 행동하였던 그의 삶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

용운의 조선불교혁신론은 매우 과격하였다. 그는 시간낭비만 일삼는 염불당을 파괴하고 민중속으로, 도시 안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번잡한 대소예식을 없애고 승려들은 구구한 계율에 얽매이지 말고 각자의 자유의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승려의 결혼허용을 주장하였고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등에 청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불교포교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 하고 대중불교확산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를 위해서 ‘승려에서 대중으로’, ‘산간에서 길가로’를 슬로간으로 내세웠다.

1910년 그는 일본이 주장하던 한일불교동맹을 반대 철폐하고 1913년 조선불교종무원을 창설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917년에는 조선불교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각 사찰을 돌면서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조선불교의 개혁과 함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 가운데 하나가 불교경전의 한글화였다. 1910년경부터 화엄경등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평생을 불교경전 한글화를 계속하였다. 그는 한문이나 산스크릿어로 되어 있는 불교경전이 읽기에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병행해서 잡지와 같은 문서를 통한 포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8년에는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 등, 제반 문제점들을 분석 비판하였으며 신 시들과 수필등을 발표, 문학에의 관심도 보였다. 또한 불교의 홍보 및 포교와 함께 계몽, 자유, 민족 정신 등을 고취하는 논설들도 실어 당시 중요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1931년부터는 <불교>잡지를 월간으로 발간하면서 불교개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한용운은 3.1 만세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불교관계 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젊은사람들을 교육하는 한편 서울에서 ‘유심’잡지를발간하고 있었다.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파리평화회와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과 일본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낭독시위 소식을 한 발 앞서 접한 한용운은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려는 기운이 어느 정도 성숙해 있는 것을 간파하고 국내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는 종교계가 힘을 모으고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거사하기로하고 일본방문시 연을 맺은 천도교의 최린을 먼저 접촉하는 한편 기독교와 유교의 대표들을 만나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에 임했던 그의 자세는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있는 공약 3장에 잘 나타나 있다. 최남선이 작성한 선언서 초안을 본 만해는 신명을 바쳐 죽음을 각오한 자로서의 결의와 당당함이 부족하다며 공약 3장을 삽입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10여년 동안 나라를 잃어 골수에 맺혔던 울분과 비애는 파고다 공원을 기점으로 거센 불길과 같이 번져나갔다. 1919년 그의 나이 중년기를 넘어선 41세, 탈속득도한지 14년 되는 해였다. 감옥에서도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 해 7월 서대문 감옥에서? 일인 검사의 요구에 의해 <3.1 독립선언 이유서>는 작성하였는데 그의 민족사상을 집약적으로 풀어보인 명문장이다. 기미독립운동의 주동자로 수감되어 3년 언도를 받고 1922년에 출감하였다. 그는 출감후에도 계속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애국 애족운동을 계속하였는데 1928년 민족주의 세력의 총 규합처였던 신간회의 조직과 세력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여 서울지회 회장직을 맡고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항일(抗日)의식은 투철하여 일제의 지배밑에서는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하며 자녀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해의 일생가운데 뗄 수 없는 것이 문인으로서의 한용운이다. 1926년 그는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였다. 10여년 전부터 ‘유심’ 잡지를 발간하면서 시와 산문시 등을 발표하였으며 훨씬 후인 1935년에는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계속해서 <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죽음’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문인으로서의 만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은 백담사에서 참선을 하면서 탈고하였다는 시집 <님의 침묵>이다. 한용운이 독립지사냐? 선승이냐 아니면 시인이냐?하는 논란도 없지 않지만 종교가, 독립지사 그리고 시인, 어느 하나 그에게서 떼어 버릴 수 없게끔 하나의 인격속에 엉키어 있었고 그것이 <님의 침묵>으로 표출되었다고 하겠다.

그의 시는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의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그의 시를 저항문학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규정짓는 것은 섯부른 생각이다. 그것은 ‘님’이 누구냐?하는 후대의 많은 논란가운데 잘 나타나나 있다. 만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 조국, 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 조선의 민족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시는 은유와 역설을 자유로 구사하면서 정형적인 시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산문적인 자유시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시들을 직접 감상해 보자.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 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만해는 눈앞의 자연에 대해서도 서정적인 안목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자연을 통하여서도 끊임없이 어떤것을 탐구하였다. 모든 자연현상이 선(禪)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은 모든 세속적인 중생에서 떠나버린 진공의 상태, 법열에의 경지다. 그곳에는 있는 것도 없으며 욕망도, 인간의 정도, 광명도, 암흑도 없는 영원한 비움, 空만이 있을뿐이다.

신동문 시인의 말과 같이 “만해의 ‘님’이 복합체였듯이 한용운 그 자신의 모습도 하나의 복합체일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독립투쟁으로 시종하기에 그는 너무나 인간의 내면과 우주의 영원을 알았으며, 고고한 선승이기에 그는 너무나 중생을 사랑했으며 타고르처럼 순순한 시인이기에는 그는 너무나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용운은 아마 ‘예술가’는 아니리라. 문학을 자기 사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또 그의 시어(詩語)가 정교하지 못함을 공격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시보다 위대한 것을 알았으며, 그리하여 그것에 봉사했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전신을 희생으로 바쳤다.”

만해는 말년 자신이 경영하던 <불교> 잡지에 많은 논설들을 발표하는 한편 불교청년운동에 힘을 기울이다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불교유신의 하나로 승려들의 결혼을 주장했던 그는 1933년에 출가후 계속되었던 독신생활을 끝내고 재혼하였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에 회갑을 맞은 그는 해방 전해인 1944년 5월 오랫동안 중풍으로 신음하던 끝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한 시대를 조국의 독립과 조선불교의 유신 그리고 중생의 제도를 위해 힘썼던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의 저서들이 있으며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국의 인간상(3)-청구문화사-신동문의 한용운-님의 언어, 저항의 언어’에서 발췌>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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