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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수)
한국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김열규  

<늘푸른나무/논설과 해설/2013년 11월>

한국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김 열 규

본지는 지난 8월 1일자에 김열규 교수의 <노년의 즐거움>이란 저서 속에 들어있는 '눈부신 노년, 그 새로운 시각에 부쳐'를 계재하였습니다. 은퇴후 30년. . . 그 가슴뛰는 삶을 시작한다며 인생 백세, 푸른 노년 공화국을 찬양하던 그의 기개를 따랐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난 10월 22일 김 교수가 81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죽음이해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책을 남긴 김 교수의 죽음은 구순까지는 살수 있을거라며 전날까지도 항암치료를 받고 <아흔 즈음>이라는 원고를 쓰다 돌아가셨다고 점에서 더욱 아쉽습니다.

<노년의 즐거움> 에 실린 '죽음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이라는 글에서 그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듯하여 소개합니다. '눈부신 노년, 그 새로운 시각에 부쳐'(Home Page 왼쪽,'생활 엣세이' 122번)와 같이 보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김열규(1932- )-경남 고성 출생으로 서강대학교 국문과 교수 등을 역임한 한국학의 석학. <한국인의 자서전> 등 한국학에 관한 저서들이 다수 있으며 1991년에 낙향하여 노년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인 두 노인이 마주 앉았다. 갑 노인이 을 노인에게 물었다.
“자네, 저승길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미쳤군! 그게 뭐가 좋아?”
그러자 갑이 정색하고 맞받았다.
“이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저승에 갔지?”
을이 화난듯이 대답했다.
“그야, 수도 없이 많지.”
“알긴 아는구먼. 그런데도 그곳이 좋은 줄을 모르다니!”
갑이 딱한듯이 을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는 것 보면, 그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알수있지 않나?”
을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죽음은 보기 좋게 긍정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을 곱게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 살아가는 노년에도. 무릎 앞일까? 아니며, 등 뒤일까?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것만 같은 곳에 노년의 죽음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일까? 내 것이 분명한데도 내가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내 것이 아닌 것. 죽음이란 무엇일까?

내게 왔을 때는 이미 나를 삼킨 후인 그 무엇. 그래서 나를 무(無)로 돌아가게 하는 그 무엇. 죽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마지막, 나의 최후인데도, 음악으로 치면 마지막 악장의 코다와 같은 것인데도,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고작인 것. 죽음의 정체는 뭘까?

해 저문 뒤에 찾아오는 어둠인데도, 다음 해돋이도, 새벽도 없는 것. 죽음은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김없이 어느 날 찾아올 게 불 보듯 뻔한데도, 끝내 내몴이어야 할, 정체를 볼 수 없는 그 무엇. 죽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물어도 물어도 끝이 없다. 빠져들어도 빠져들어도 바닥이 없는, 심연같은 물음. 죽음은 그런 물음 같은 것이던가?

“한번 가면 그만인 인생!”
“저승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저승일세.”
“눈 감으면 끝인 것을!”
“그렇게 가버릴 것을 공연히 . . . “
“마지막 길, 기척도 없이 가버리고!”

흔히들 말하고 듣는 말들이다. 허무가 안개처럼 서려 있다. 삶의 무의미. 생의 덧없음. 땅이 꺼질듯한 한숨 소리 . . . 허탈하다. 맥이 있는대로 다 삭는다. 하지만 다른 분위기의 말들도 없지 않다.

“죽자 살자 . . .”
“죽기 살기로 . . . . . “
“죽으면 죽었지 . . .”
“사생결단하고 . . . . “

이 말들은 또 뭔가? 허무의 독백들 앞에서 난데없이 웬 악지일까? 여기 언급된 죽음엔 생기가 지글대고 있다. 삶의 악바리가 곧 죽음이라고 우길 기세이다. 이 돌변은 변덕에 지나지 않는걸까?

우선은 한국인이 죽음을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강조해 두는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인이 바라보는 죽음의 음지와 양지.

하지만 종잡을 수가 없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어쩌자는 것일까? 해도 해도 너무한다. 그런데 바로 그게 죽음일지 모른다. 하긴 죽음만큼 다양한 수사학을 아우르는 말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도 역시 죽음의 양지와 음지가 있게된다.

죽음의 수사학이라니! 한국인의 말솜씨. 말재주가 사뭇 죽음에서 살아나고 있다면 과장일까?

죽음을 두고는 전형적인 은유법에다가 은유법의 아종(亞種)인 대유법, 제유법, 그것도 모자라서 우원법(迂遠法, 돌려서 말하거나 피해서 말하기)까지 쓰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과장법도 꽤나 큰 구실을 하고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단연 우원법이 돋보인다.

떠나가다
돌아가다
세상과 하직하다
별세하다
서거하다
장서하다
타계하다

모두 돌려서 말하기인 동시에 죽음을 ‘가는 것’에 빗댄 은유법이기도 하다.

숨지다
눈감다
밥숟가락을 놓다
영면(永眠)하다

이 말들은 죽음에 수반되는 여러 생리현상 가운데 어느 한 부분으로 죽음을 대변하고 있다. 제유법을 겸한 우원법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버리다’라는 말도 자주 쓰이고 ‘기세(棄世)하다’나 ‘하세(下世)하다’ 같은 말도 드물게 쓰이고 있다. 이것들은 중간에 무언가를 그만두는 행위에 죽음을 빗댄 우원법을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를테면 ‘종교적인 우원법’도 있다.

입적하다
적멸하다
성불하다
왕생하다
극락 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전인 우원법도 흔히 쓰인다.

천당 가다
주님의 부름을 받다
안식에 들다

죽음 이외에 이렇게나 많은 우원법이 쓰이는 말은 없다. 죽음은 우원법의 천국이다. 한편 죽음이란 낱말과 더불어 인간이 꿈꾸어온 사후 세계 역시 적잖은 우원법을 갖추고 있다.

저 세상
딴 세상
영계(靈界)
타계
극락
서방정토
천당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우원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바로 죽음에 관한 한국인의 생각이다.

첫째, 이 말들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나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이 담겨 있을 것이다. 최대한 죽음 자체에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것이다. 따돌리고 모르는 척하자는 것이다. 아니, 아예 죽음이 없는 척해보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죽음을 무서운 부정(不淨)으로 보는 시각도 작용하는 것 같다.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화근이 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게 부정인데, 그중에도 죽음은 가장 큰 부정으로 여겨져왔다. 노년에는 마음을 다잡아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되도록 멀어져야 할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떨지도 말고, 또 죽음이 부정하다고 치를 떨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둘쩨, 첫째와는 상반되게 죽음을 미화하고, 더 나아가 성화(聖化)하거나 승화(昇化)하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구원, 해탈, 해방 등의 개념도 큰 역할을 하고있다. 이것은 죽음이 어둠인 동시에 빛임을 암시한다. 또한 소멸인 동시에 새로움임을 의미한다. 노년에 들어서면 죽음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한마디, 한국인이 즐겨 쓰는 관용구 한마디에는 한국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세 번째 시각이 들어 있다.

“이래서는 죽어서 눈이나 감겠나?”

한국인에게 ‘눈을 감는 죽음’과 ‘눈을 못감는 죽음’은 서로 다른 죽음의 범주이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 부릎뜬 눈, 생시보다 더 크고 무섭게 부릅뜬 눈은 자신이 생전에 못다한 일을 노려보고 있다. 억울하게, 원통하게, 또는 서럽게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꼬나보고 있다. 생전에 만나지 못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 요컨데 무엇인가 못다 이룬 일을, 무엇인가 미완의 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쉽게 날 수 있다.

‘눈을 못 감는 죽음’이란 말을 쓸 때 우리는 죽음을 미완의 삶을 완성시키는 계기, 삶이 못다한 것을 마저 일구어내는 단서로 가꾸고 싶은 것이다.

죽음으로 삶의 악착스러움이 돋보이게 된다. 죽음으로 삶의 의지, 그 결의가 한층 기세등등해진다. 삶의 뜻을 일으켜 세우는 죽음! 실로 매우 짜다. 삶이 짜다면 죽음은 짜다짜다. 짜고 또 짜다.

죽은 이가 눈을 감고 편히 저승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이 온전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그 자취가 죽음의 길을 닦는다. 죽음을 위한 길잡이가 된다. 이건 한국인이 죽음에 부치는,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이념이다.

노년에 들어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에 대한 이 세번째 생각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다. 죽음은 삶을 온전한 것으로, 보람찬 것으로 완성시켜주는 소중한 계기요, 동기라는 생각을 가슴깊이 다짐해두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노년의 삶이 오히려 더 푸를 것이다. 노년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친구로 죽음을 대하게 될 것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ViaBook Publisher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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