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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27(수)
한국의 잔다크 유관순  

<늘푸른나무/이달의 인물/2013년 3월>

한국의 잔 다아크 유관순

천안에서 50리쯤 떨어진 지령리는 봄에는 진달래가 피고, 늦은 가을이면 들국화가 피며 단풍이 든 나무들이 울긋불긋 장식하는 가운데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나라가 점점 망해가고 있던 1904년(광무 8년) 3월 15일, 이 마을의 인망있던 유중권의 집에 게집아이가 출생했다. 아들만 있던 유씨 집안에서는 경사가 난 것이다. 그러나 그 아기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유관순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관순이 7살 되던 때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으나 그런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의 아버지 유중권은 가만히 앉아서 나라를 빼았기는 것을 분히 여기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을 길러야하며 그것은 서양문물을 배우고 가르치는데서 나온다고 확신하고 동지들을 모아 ‘흥호학교’를 세우고 동네에 교회를 세웠다. 당시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았으며 특히 신교계통의 사립학교들은 민족사상을 길러주는 온상의 역활을 하였다.

근면하며 대단한 신앙심을 가지고 학교경영과 전도에 정성을 다하는 아버지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 관순은 학교공부와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주에 있는 감리교출청도지방의 사부인이라는 여선교사가 찾아왔다. 지방에서 관순이를 서울 이화학당에 보내 공부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은 서슴치 않고 허락하였고 이 뜻밖의 소식에 관순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니는 사촌언니 에더를 통하여 붉은 벽돌집의 이화학당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언니처럼 그곳에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이렇게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다.

열 세살때 관순은 가족들과 동무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 사부인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초가집밖에 보지못한 관순에게 서울은 놀라운 곳이었다. 훌륭한 학교시설은 물론 생전 처음보는 풍금, 피아노, 재봉틀 등 신기하기만 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학과, 중학과, 보통과, 유치원 등 네 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모든 교과를 공부할 수 있었고 학생들은 교비생과 매일학생으로 나뉘어 교비생들은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기숙사에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다. 교비생으로 입학한 관순은 점차 학교생활에 익숙해 갔다. 쾌활하고 개방적인 그녀의 성격은 곧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관순은 여성도 신학문을 공부하여 지식을 쌓으면 훌륭해 질 수 있다는 희망에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이러한 새 생활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에도 부지런 하였다. 2년간의 보통과 과정을 마칭무렵 기숙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학생으로 선정되었으며 보통과 과정을 마친후 고등과 1년생이 되었다.

그동안 나라의 사정은 일제의 발 아래서 더욱 짓밟혀 갔다. 105인 사건으로 애국지사들은 붙잡혀 들어가고 땅과 재산을 착취당한 농민들은 만주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났으며 애국지사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고 일인들의 차별대우는 더욱 더 심해지는 한편 식민지 정책은 더욱 포악해져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사상 유례없는 사상자를 낸 세계 제1차 대전이 1918년 11월 끝나면서 세계의 식민지들이 자각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함으로 자주와 독립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이에 맞추어 한국에서도 독립을 위한 움직임 일기 시작했는데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는 한편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이와 같은 안과 밖에서 성숙해온 독립에의 염원이 조국에 모여 폭발한 것이 3.1 만세운동이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1월 22일 고종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과 함께 독살당했다는 소문까지 퍼져 인심이 흉흉하자 일본경찰은 감시를 강화하며 문상도 제한하였다. 그러나 3월 3일 고종의 인산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서울 거리는 사람으로 뒤덮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3월 1일 종교계의 대표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과 만세행진을 하였는데 민족의 슬픔과 기쁨, 치욕과 원망이 폭발한 것이다.

이때 관순은 고등과 2년 진학을 앞둔 16세의 처녀였다. 3.1 운동때에는 외출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역활을 하지 못하였다. 정동에 있던 기숙사의 창문을 통해 만세 인파를 보고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결국 관순은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목한 채, 사촌 언니 에더와 함께 강제로 무기방학이 된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관순은 서울에서의 3.1 만세 이후 계속해서 전국 방방곡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집으로 오는 동안에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향 지령리는 너무나 조용하였다. 인근 마을에서도 만세를 부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순은 이 마을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을 유지들을 예배당에 모아 자신이 듣고 본 것을 이야기하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아오내 장날인 음력 3월 1일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관순과 에더가 앞에 나서서 인근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의 교회와 유림등을 찾아 참여를 호소하였고 나중에는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참여를 호소하였다.

2월 그믐밤, 비장한 각오로 예정된 거사의 실행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든 관순은 다음날 3월 1일 아침, 아오네 동네어구에서 몰래 만든 태극기들을 나누어 주었다. 12시가 되자 관순이 군중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10년간이나 왜놈의 압박 밑에서 자유 없이 살아왔습니다. 지난 양력 3월 1일 서울에서는 우리나라가 당당한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불러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아울러 삼천리 방방곡곡에서도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 마을도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 . .” ?군중들은 일제히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어 ‘대한민국만세’를 소리높여 불렀다. 관순을 비롯한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헌병대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

이때까지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의심은 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헌병들은 만세소리에 놀라 당황하여 칼을 빼어들고 뛰어 나오다가 맨 앞에서 오는 사람을 무조건 찔렀다. 피를 본 군중들은 흥분하여 일본헌병들을 구타하였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오직 자유와 독립뿐이니 앞날을 위하여 참자”는 관순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 헌병대 유리창이 깨지고 유치장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풀어내는 등 난장판이 된 가운데 천안에서 자동차로 출동한 구조대들의 무자비한 보복이 진행되었다. 마구잡이 총질에 30여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들어 있었다. 부모를 졸지에 잃은 여학생 관순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모자로 끌려갔다.

잡혀온 관순은 일본 헌병들의 주모자를 대라는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명을 받아 스스로 나섰을 뿐이니? 자기만을 형벌하고 다른분들은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자기가 끝내 전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다.

헌병대에서 관순을 혹독한 고문으로 또는 회유책으로 심문했으나 끝내 주모자라고 주장하엿다. 헌병대에서는 그를 공주 검사국으로 넘겼는데 그녀는 공주로 넘어가면서도 사람이 모인 길목을 지날 때면 으례 만세를 불러 호송하는 헌병들을 당황하게 하였으며 칼에 맞기도 했다.

공주 검사국으로 넘어온? 관순은 유치장에서 같은 죄수로 묶여 있는 오빠 관옥을 만났다.

여기서 관순은 7년의 구형을 받았다. 그러나 법정에서 관순은 당당한 한국인이 일인의 재판을 받을 수는 없다고 심문에 응하지 않고 끝내 항거하였다. 결국 3년의 언도를 받고 복심법원에 상고하여 서울로 호송되었다.

관순은 서울로 호송되는 도중에서도 사람이 있는 곳이나 동네를 지날 때는 모진 매를 맞아가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왜첬다. 서울 복심법원 재판소에서도 독립만세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일인의 재판을 거부했다. 그녀는 최종 재판에서 7년의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으로 끌려갔다.

관순은 감옥에 들어오던 날 밤도 취침 전에 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소리에 다른 감방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간수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항일과 독립정신의 화신 관순은 굽힐 줄 모르고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했던 것이다. 만세를 부르고는 폭행을 당하고 또 만세를 부르고 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이 감옥 안에는 이화학당의 선생인 박인덕도 함께 갇혀 있었다. 관순의 이 안타까운 정경을 보고 그는 여직원을 통하여 몰래 타일렀다. “만세를 부른다고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공연히 네 몸만 상할 뿐이다. 감옥 내의 동지들에게도 해가 미치니 참도록 하라” 관순은 선생의 이말을 듣고 나서부터 모든것을 참았다. 그리고 늘 성경팩을 읽으면서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렸다 한다.

모진 매질과 포악한 고문, 눈 앞에서 헌병들의 총에 무참히 쓸어진 양친의 죽음, 추운 겨울 차디찬 마루바닥의 옥중생활 등으로 관순의 육신은 쇠할대로 쇠약해 졌다. 그러나 조국에의 불타는 마음은 결코 사그러지지 않았다. 어느덧 기나긴 겨울도 지나고 3월 1일이 가까이 왔다. 관순은 감방의 친구와 상의하여 비밀리에 각방으로 연락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다같이 왜치며 3.1절을 기념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 봄의 냉기가 스며드는 서대문 감옥은 피맺힌 ‘대한민국만세’를 절규하면서 3.1 운동의 뜻깊은 1주년을 기념하였다. 관순이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해 10월 20일, 관순은 마침내 감옥속에서 쓸쓸히 숨지고 말았다.? 17세도 못되는 처녀의 순정과 사랑을 송두리채 민족의 제단에 희생제물로 불사른 유관순. 비록 뜻은 이루지 못하고 해방의 감격을 모른고 가버렸지만? 그녀의 얼은 민족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의 인간상 6, 근대선각자 편(신구문화사)>에 수록된 박용옥의 유관순/한국의 잔다크(P.161-172)를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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