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30(화)
민족불멸의 왕관 세종대왕(요약)-이광린  

<늘푸른나무/ 이달의 인물/2012년 10월>

<민족불멸의 왕관 세종대왕> -이광린

학문을 좋아하였던 영주

태종의 위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권을 이어받기에는 너무나 난봉꾼이었다. 책을 읽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활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궐 담을 뛰어넘어 하인무리들과 섞여 다녔고 밤마다 그들을 궁중으로 끌여들여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온갖 장난을 다하였다.

아버지 태종이나 여러 신하들에게 주목을 받아 왕세자에 대한 불평이 싹트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라의 여러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왕세자의 폐위를 권했고 태종 자신도 그 의견에 찬동하여 마침내 왕세자를 폐위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의 왕세자를 누구로 책봉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태종은 ‘왕자가운데 어진 자를 책봉함이 마땅하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의 세째아들 충녕(忠寧)대군을 세자로 봉하였다. 태종 18년의 일이다.

세종은 어느왕자보다도 세자가 되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기억력도 비상하였다. 무슨 책이든지 좋아하여 반드시 백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학문 이외에는 딴 취미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세종인만큼 그가 즉위한 2년(1420)에 고려왕조때부터 존속하였던 집현전을 대폭 확장하여 궁중에 설치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고금의 서적을 수집하는 한편 젊고 유능한 선비 20명을 선발하여 학사로 임명하고 순전히 학문 연구에만 힘쓰게 하였다. 그리고 학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극진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학사를 신선(神仙)처럼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학문을 좋아하던 왕은 또한 효도, 우애하는 왕이었다. 세종은 아버지에 대해서 공경과 정성을 다 하였고, 아버지 또한 아들에 대해서 신뢰와 애정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또한 세종은 왕세자의 자리를 폐위당한 형 양녕대군과도 가까이 지냈는데 양녕대군은 자기보다 훨씬 유능한 둘째 동생에게 선선히 자리를 물려주고 조금도 불만이 없이 산천을 유람하였고, 세종은 형의 호호탕탕한 흉금을 남달리 존경하여 기회 있는대로 가까이 형제간의 우정을 즐겼다.

세종은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고 언제나 말이 적었으나, 그는 넓은 도량을 가지면서도 만사에 정밀하였고, 고상한 태도를 가지면서도 중용을 견지하였다. 당대의 정치가요 문장가인 정인지가 세종의 능인 영릉 비문에서 그를 가르켜 ‘실로 동방요순(東方堯舜)’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쏟아져 나온 백과전서파

집현전에 모인 학사들의 연구는 비단 경사(經史)에만 한하지 않고 제자백가, 천문, 지리, 의약, 복식 등 모든 영역에 미쳤다. 그러나 그들이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역시 제도와 고전연구였다. 전왕조인 고려조까지는 불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씨왕조가 세워지면서 부터는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등장하여, 자연히 국가의 조그마한 의식 제도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것으로 바꾸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은 유교 지상주의 국가의 토대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의 고제(古制)와 고전(古典)연구에 힘을 썼다.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서적을 출판하게 됨에 따라서 자연히 인쇄술의 개량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은 천문과 역학과 같은 과학에도 깊은 취미를 가져 젊은 과학자 등을 가까이 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를 제작하고 역법을 개정하였다. 그의 과학문화에 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세종 24년(1442)에 동(銅)으로 된 측우기를 제작, 서울과 각 지방 관청에 비치하고 비올 때마다 강우량을 측정 중앙에 보고케 한 것이다.

세종시대에 와서 이와같이 각종 과학문명이 급격히 발달하게 된데에는 세종 자신의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큰 몴을 하였지만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이루어진 문화교류를 통해 얻은 아라비아 등지의 과학정보들을 젊은 학자들을 통해 제대로 정리 흡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들은 모두 실용성이 있는 학문이었다. 천문학이나 역학은 농업과 직접 관계가 있었고 수학만 하더라도 회계뿐만이 아니라 세법을 개정하고 전지(田地)를 측량하는데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세종의 관심과 지식은 다양하여 여러 부분에서 정리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지리, 농사, 의약서의 편찬 그리고 악보의 발명 등도 나타났다. 이처럼 세종은 다방면에 걸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학자들의 연구를 장려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솔선하여 기왕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또한 새로 창조하여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학문의 황금시대를 이룩해 놓았다.

민본주의의 정화, 한글

세종이 이룩한 업적중에 우리 민족사상 가장 획기적이요, 독창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한글의 창제일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따로 문자가 없어 중국문자를 써서 의사표시를 하였으나 원래 한국어와 중국어는 문법체계가 달라 오랫동안 공부한 학자계급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이 완전히 습득하여 사용하기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본시 학문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계속 끊임없는 정열을 가지고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던 세종은 이번에는 문자 창조라는 새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원래 중국의 음운학(音韻學)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우리 말을 한문으로 제대로 옮겨 적을 수 없음을 아타깝게 여겨 한글의 창제를 추진하였다.

정음의 자음(子音)은 발음기관의 형태를 상징하고, 모음(母音)은 동양 고래(古來)의 삼재(三才)사상인 천, 지, 인의 형태를 상징한 표음문자로서 간명한 형식, 과학적인 조직, 완전한 효용은 세계의 어느 문자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다.

한글 창제의 동기와 목적은 훈민정음 첫머리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를 가지고는 서로 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충분히 펼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매우 불쌍하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일상생활의 편의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한글, 훈민정음은 그야말로 이 나라의 백성을 위한다는 말하자면? 확고한 민본주위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계 역사상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해서 문자를 만든 왕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세종의 고귀한 동기와 업적을 알 수 있다.

모화사대(慕華事大)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일반유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정음을 창제한 뒤 그 보급책을 꾀하기 위해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그 안에 인쇄소까지 마련하여 많은 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우선 정인지 등에게 <용비어천가>를 를 짓게하여 진상케 하는가 하면 많은 글들을 만들게 하여 일반백성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게 하였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사상 획기적이요 창조적인 것으로 세종의 큰 지혜와 열의의 결정임을 알 수 있다.

국토의 개척

세종대왕 임기중 중국 명나라와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쪽 여진족과 동쪽 일본 대마도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였다.

세종 4년(1422년)에 여진족의 침구가 그치지 아니하자 세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강토는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며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썼다. 거기에는 고려말에 전래된 화약병기를 세종때에 와서 전면 개량 보급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절제사로 보내어 세종 16년부터 종성, 회령, 경원, 경흥, 온성, 부령 등 6진을 개척 두만강 이남을 완전장악하는 한편 압록강 방면에는 강계부를 설치 압록강 남부 일대를 조선령으로 하였다.

대마도는 산과 바위로 덮여 경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고려때부터 조공을 바치고 미곡을 하사받아가는 형식으로 생활하였으나 양국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이것이 잘 시행되지 않으면 이들은 해적이 되어 남부 일대에 처들어와 식량을 약탈해 갔다. 세종은 융화책을 써서 이들에게 동래와 웅천에 항구를 개방하여 왜인들이 무역을 하도록 허용하고 철저하게 단속,규제함으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세종은 생활이 어렵고 성질이 사나운 이웃 이민족들에게 대해 일면 공격, 일면 회유의 두 외교정책을 견지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유신들과 싸우며 이룩한 업적

집현전을 설립하고 학사로 하여금 고제와 고전을 연구시켜 결국은 유교지상주의국가를 만들어 보자고 애쓰던 세종은, 자연히 유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초기에는 여러가지로 불교탄압책을 강구하였다. 세종은 6년에 기왕의 불교 7종파를 선종(禪宗), 교종(敎宗)의 양파로 통합하고 기타 사찰에 속해 있던 땅과 노비를 몰수하였다. 그리고 민간의 상례에는 불교위식을 금하고 반드시 주자의례(朱子儀禮)를 따라 실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불교는 비록 조정의 탄압을 받기는 하였지만 민중에 깊이 뿌리밖고 있어 여전히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의 할아버지 태조, 아버지 태종도 불교신자였고 왕비를 비롯한 궁녀, 내관들 가운데도 불교도들이 많이 있었다. 세종 역시 이러한 불교적인 분위의 영향을 받았으며 독서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혔던듯 하다. 세종은 즉위 10년 이후로는 불교를 옹호하는 정책을 실시하더니 20년을 전후해서는 본격적으로 불교 신자가 되었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연히 유신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즉위 32년 죽기까지 말기 10여 년간의 그의 생애는 유학자, 특히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던 집현전 학사들과의 싸움으로 일관되었다.

“불교는 이단이며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좀먹게 하며, 집을 망하게 하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종교이니 불사를 중지하고 불교를 억압하십시오”라는 유신들의 상소도 뿌리치고 사찰들을 중수하고 궁성내에 사찰을 지었다.(세종 30년) 세종의 불교신앙은 또한 아들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아버지보다 더 돈독한 숭불가(崇佛家)가 되었다.

고루한 유신들은 세종이 창안한 한글도 계속 무시하였으나 많은 불교의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여 한글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종이 불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한글은 그나마도 발전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세종의 진면목은 유교와 불교를 다 함께 받아 들이는 넓은 도량에 있다 하겠다.

세종은 즉위 32년 (1450) 불치의 중풍을 앓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불제자로 운명하였으며 그의 장의는 불식(佛式)에 따라 거행되었다. 그의 능인 영릉(英陵)은 처음에는 광주의 대모산에 모셨다가, 그 뒤 예종 때에 여주(驪州)로 옮겼다.

 

*이 글은 신구문화사 간 <한국의 인간상 1권 왕가.정치가 편>에 들어 있는 이광린의 '민족불멸의 왕관'을 축소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