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13(일)
<특집-4.19(시와 가족수기>  

<늘푸른나무/특집-4.19/2012년4월>

4.19 혁명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가슴을 총탄앞에 헤치고
달려왔노라.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에 피거름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말라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 날 4월 19일

4.19 기념회관에 걸려있는 시

 

내 아들은 외롭게 갔다.-이계단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지난 10년 동안에 강신도 변했고 세상 물정도 변했으며, 4.19를 느끼는 사람마다의 생각들도 변해가고 있는성 싶습니다. 시간을 한 곳에 머물게 할 재주가 없는 한 세월은 자꾸 흘러가게 마련이고, 그러는 동안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겪었던 일들이 희미해지게 마련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미련이나 아쉬움 없이 ‘잊어 아깝지 않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 ‘그래서는 아니될 일’ 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60년 4월 22일, 주위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관돼 있는 관을 뜯고 아들 근형이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수도의대 부속병원) 전 울지 않았습니다. 남보다 더 높은 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시 혼백이 빠져버린 경황없는 심리상태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위태위태하던 핏줄이 아예 끊겨버리고 말았다는 절망적인 현실이 무서웠고, 자정이 넘어도 문 열어 달라는 근형이의 인기척이 없다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새우게 했습니다.

근형을 낳은지 100일도 되기 전에 ‘과부’라는 박복한 여자가 되어야 했고, 그후 24년이라는 ‘길고 고독한 세월’이 있었습니다. 갖은 고초를 겪는 동안 아들이 홍성중학을 졸업하게 됐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그 앤 군문에 들어갔었습니다. 8순이 넘은 조부모와 나는 한 발자국이라도 아들과 가깝게 살아 보겠노라고 고향의 논밭을 팔아 서울로 이사를 하였었습니다. 근형이가 제대를 하고 온 날, 저는 그 애를 위해 치르어야 했던 오랜 세월의 고통을 보상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젠 저도 성실하게 노력해서 장가도 가고 아들 딸을 낳아 줄줄이 이어온 외로운 혈통을 끈질기게 이어내리겠지’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 돼버렸습니다. 아들 가고 난 후 수차 신문사에서 취재를 해 갔었지요. 그때마다 나는 울지도 않았다고 했고, 장한 아들 두게 되었던 걸 자랑한다고도 했었습니다. 낸들 왜 기쁘고 즐겁고 슬프고 노한 감정이 없었겠습니까? 그렇다고 역사적 사건에 참가했다 승천해버린 아들에 연연해서 눈믈을 쥐어짠다는 초라함을 보이느니보다, 슬픔을 뛰어넘은 모질긴 어미를 보이는게 고인에 대한 경건한 태도인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원호법이 만들어졌고, 원호대상을 취업시켜 주는 덕택으로 철도병원 청소부로 일하게 됐었습니다. 그곳에서 본의 아니게 면직된 후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지요. 고향에 내려와서는 종이봉투를 만드는 일로 매월 5천원 남짓 벌게 되었고, 그걸 모아 두었다가 4월이 오면 불우한 아동들의 학비에 보태라고 내놓곤 합니다. “장차 큰 사람이 되거든 4.19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곁들이면서요.

4.19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무방한 일이었는지, 나라 잘되는 일에 굉장한 역활을 한 것이었는지는 지금 나로서는 구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한때는 온통 4월혁명 찬양홍수였는데, 요사이는 190명의 무덤 앞 돌에 꽃다발 얹어놓는 게 고작인 듯하니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흥분하여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면 남은 생명을 울음으로 바쳐야겠고, 온 국민이 다 자유스럽고 윤택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바쳐진 ‘민주제단의 희생’이었다면 꿋꿋한 지금 이 걸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이글은 4.19 당시 3대 독자 고 이형근 군을 조국의 민주제단에 바친 그 어머니의 수기이다.

<사월혁명 사료집 '4.19의 민중사'-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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