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관련 논문들   ▒  

2012/3/30(금)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  

<늘푸른나무/이달의 인물/2012년 3월>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
-계명을 밝힌 지성-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 운동의 횃불을 든 33인과 각 지역의 대표들이 대한민국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면서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다.

1890년 4월 26일(음력 3월 8일)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던 최헌규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서 1957년 10월 10일 6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서울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육당의 성장과정

이씨조선의 국운이 날로 저물어 가던 19세기 말, 그가 태어나기 8년 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6년 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때에는 민씨 외척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불평이 극심하였고 그 결과 동학란이 폭발하였으며 이를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청 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 등이 조선 조정의 정치에 개입하면서 그가 6살이던 때에는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가 15세 때에는 의정서를 통해 조선이 일본의 세력아래 들어갔고 20세이던 1910년에는 조선이 일본에 완전히 합방되었다.

학교에 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친 육당은 여섯살 때 처음 글방공부를 시작하여 한문을 습득하면서 한글로 쓴 이야기책들과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문으로 번역된 기독교 문학들 그리고 서양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죤 번역의 ‘천로역정’과 ‘태서신사’ 등이 있었다. 그는 서양문화에 관한 새로운 소식들을 배우고자 당시에 발간되던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특히 논설들을 애독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글들을 습작하였는데 그가 12살 때 지어 투고한 글들이 ‘황성신문’ 등에 당당히 계재되었다고 한다.

13살 때 글방학교를 그만두고 ‘경성학당’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일본말을 배웠으며 열 다섯살 되던때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한국의 황실 유학생 50명을 보내는데 최 연소, 최고 득점자로 선발되었다. 최연소자로 유학생회의 반장을 맡았던 육당은 유학생 사이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3개월만에 일본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왔다.

이때가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았아가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을 계재,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던 때로 육당 역시 비분강개하여 한편의 글을 써 ‘황성신문’에 계재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06년 일본 헌병대에 체포, 한 달동안 구금되었으며 이것이 그가 글때문에 화를 입어 구금된 최초의 사건이다.

그 후에도 다른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이 문제가되자 일단 피신하였다가 2년 후인 1906년 다시 일본유학의 길을 떠나 와세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유학계획도 교내의 한국학생들 70여명이 학교당국의 한국학생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자진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3개월만에 끝났다. 와세다에서 3개월만에 끝난 유학생활로 최남선의 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이후의 학습은 모두가 독학으로 이룬것들이다.

육당의 문화사업

학교를 퇴학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은 국민을 깨우쳐 하루빨리 근대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깨우쳐 서양문화의 요체를 알도록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7세의 최남선은 고국에 돌아가면 문화사업을 크게 일으키겠다고 결심하고 부친의 허락을 얻어 도꾜의 가장 큰 인쇄공장에서 인쇄시설 일체를 사가지고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직공까지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리고는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인쇄소를 차리고 1908년 11월에 <少年(소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1889년에 <한성월보>라는 잡지가 처음 발간되었으나 곧 폐간되었고 당시에는 잡지라고는 전혀 없던 때였다. <소년>이란 ‘어린이’라는 뜻이 아니고 노년과 대칭되는 단어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잡지란 뜻에서 정한 제호였다.

당시로는 처음 보는 새로운 편집체제의 신식잡지인 <소년>은 신학문을 가르쳐주고 서양문화의 소개와 과학지식의 도입에 힘쓴 계몽잡지로 신체시를 소개하고 언문일치의 문장운동을 전개하여 독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때로는 재판을 발행하기도 하였으나 어떤 때는 일본 헌병대에 압수되어 어렵게 만든 잡지가 배부되지 못하고 폐기되기도 하였다.

최남선은 원고를 쓰는 일에서부터 기계를 조작하고 종이와 잉크를 사들이는 일, 광고를 모집하고 헌병대에 출두하는 일까지 모든 일들을 직접하면서 정열을 쏟았으나 1911년 1월까지 4년 동안 23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최남선은 출판사업에 바쁜가운데도 휘문, 중앙, 경신학교 등에서 조선역사를 가르쳤으며 도산 안창호가 30세에 귀국하여(1907) 힘을 기울인 ‘청년학우회’(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네가지 정신으로 장차 나라를 짊어질 우수한 청년을 기르자는 구국운동) 조직에 참가하여 연설과 출판을 통해 운동에 앞장 섰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도산이 일본헌병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추방되자 청년학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최남선이 두번째로 일본유학차 동경에 갔을 때 그곳에서 문학을 공부하러 와있던 이광수와 홍명희를 만나 가깝게 왕래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광수는 최남선이 만드는 잡지에 계속 원고를 보내주었으며 둘 사이에 깊은 교류관계를 유지하면서 1914년 육당이 새로이 발간한 잡지 ‘청춘’을 중심으로 ‘육당, 춘원 2인 문단시대’를 이끌어 나갔다. 육당이 <청춘>잡지를 발간하던 때에는 <소년>시절과는 달리 많은 학자들과 문사들이 ‘조선광문회’를 중심으로 모여 들어 집필자가 되어 주었으며 1914년에서 1918년까지 교양을 중심으로한 종합잡지였지만 춘원같은 문예에 관심을 가진 인물들이 있어 신문학의 길을 여는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육당과 기미독립운동

당시 지식인들의 총본부와도 같았던 <광문회> 주변에는 1918년 여름부터 파리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관한 이야기들과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기사들이 들려왔고 최남선을 비롯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국내에서도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의논들이 있었다. 가을에 들어서자 미국에 망명중인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등이 독립을 호소하기위해 파리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천도교의 손병희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모의를 거듭한 끝에 1919년 1월 최인의 집에서 송진우, 현성윤, 최남선 등이 자리를 같이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킬 방침을 구체적으로 토의하게 되었다.

각 단체들과의 협의가 끝나고 날자까지 결정되어 마지막 준비를 하면서 시위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독립선언서를 누가 작성하느냐는 문제가 나왔을 때 육당의 첫 번째 일본유학시 함께 하여 가까웠던 최인의 권고로 최남선이 쓰기로 되었다. 최남선은 이 중임을 맞고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독림선언서와 일본 의회에 제출할 글을 썼을뿐 아니라 자신이 운영하던 보문관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직공 하나만 데리고 직접 조판까지 하였다.

육당이 기미독립운동에 이렇게 깊숙이 개입하였음에도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에 들지 않은 것은 서명자들이 구속될 것에 대비하여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의 이름을 일부러 빼 뒷수습을 하라고 하였던 것인데 독립선언문의 문체가 최남선의 것이라는 것을 총독부 검열관이 먼저 알아냄으로 최남선은 첫번째 검거대상으로 3월 3일에 체포되어 2년여 동안을 옥살이 하였다. 1921년 10월 가출옥으로 석방된 육당은 감옥문을 나오면서 책꾸러미를 들어보이며 “전문학교 하나 마친 것 만큼 공부하였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출옥한 육당은 아듬해 15년동안 운영해 오던 <신문관>을 폐쇄하고 동명사를 창립 <동명>이라는 주간 잡지를 발간하였으나 경영난으로 폐간하고 1924년 3월에는 일간신문 <시대일보>를 발간하였으나 역시 경영난으로 오래 계속하지 못하였다.

육당의 저술활동

<시대일보>를 떠난 뒤 최남선은 서재에 들어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가 처음 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 학문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 받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다. 동방의 문화를 말할 때 반드시 중국이나 인도를 그 근본으로 삼고 있는데 사실은 단군신화의 무대인 태백산, 즉 백두산에서 발원되었다는 주장으로 당시 학계에서는 매우 독창적이도 대담한 발론(發論)이었다. 1925년에 완성되어 1928년에 일본말로 번역되어 <조선 급 조선민족>총서에 실렸었다.

1926년에는 <불함문화론>을 더 깊이 탐구한 <단군론>, 상고시대의 민족, 사회, 문화, 풍속 등을 다룬 <아시조선(兒時朝鮮)>, 1925년 백제의 옛 터전을 돌아보고 쓴 기행문 <심춘순례(尋春巡禮)> 그리고 자신의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등을 출판하였다. 그 후에도 백두산 답사기 <백두산근참기>, 금강산 기행문 <금강예찬>,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3천리 전역의 풍경을 노래로 엮은 <조선유람가> 등을 내었고 <조선역사>를 발간하였다. 그의 조선고대사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와 삼천리 금수강산에 대한 애착심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발간하면서 함께 실은 <역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이라는 글이 조선인들을 폄하하는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1928년 최남선이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의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최남선에 대한 평가가 갈리게 되었다. 조선역사를 외곡하려는 총독부의 궤교에 정정당당하게 맞서서 바로잡기 위한 그의 애국충정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들의 궤교에 말려들어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38년 최남선이 일본이 만주에 허수아비로 세운 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있는 국립 건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만몽문화사(滿蒙文化史)>를 강의하면서 그곳에서 염상섭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만몽일보>의 사장이 되었다. 이 역시 일인들에 이용당한 행보라는 견해와 감시가 삼엄했던 조선을 떠나 있기 위한 방편이요 북경의 중국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보는 다른 견해가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을 때 최남선이 신경에서 중국학생들과 조선학생들에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것은 자살행위다. 반드시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는 증언으로 보아 그가 의도적으로 일본에 협력한 것은 아닌듯 하다.

1942년 말 병을 이유로 건국대학을 사퇴하고 귀국하였으나 다음해 <고사통(故事通)>이란 이름의 조선역사책을 출판한 것으로 보아 비록 그가 전쟁말기 일본에까지 가서 유학생들에게 학병으로 자원하도록 격려하고 글을 썼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당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조선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없이 어떻게 조선역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으며 전쟁말기 눈이 시빨건 일제의 감시속에서 어떻게 조선역사에 관한 책을 발간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일제하에서 책이 발간되자 4, 5만부가 다 팔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5년 해방이 되자 최남선의 친일행각에 관한 논란이 더욱 심하여 졌으나 육당은 서재에 들어앉아 열심히 원고를 썼다. 달리 조선역사에 관한 책을 찾기 어려웠던때 그의 <조선역사>와 <고사통>은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고 그 후에도 그가 집필한 책들은 장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후 ‘반민족행위자 처단법’이 제정되어 최남선은 이광수와 함께 구속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는데 이듬해 1950년 6월 6.25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는 무사히 화를 피하였으나 셋째 아들이 행방불명되고 큰 딸은 북한군에 학살되었으며 큰 사위는 납치되었다. 다행히 행방불명되었던 큰 아들과 납북되었던 둘째 아들이 돌아와 큰아들과 함께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52년 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옛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국가의 난국을 극복하였는가를 규명하려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를 집필하였으며 <국사사전>편찬에도 착수하였다. 1954년 중풍에 걸려 쓰러진지 3년여만인 1957년 10월 10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5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베드로란 이름을 얻었다.

나라가 어려웠던 때 나를 알기 위하여 조선사 연구에 전력하였고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만이 나라가 독립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문화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던 당대 3대 천재(최남선, 이광수, 홍명희)의 하나였던 육당은 30도 안된 젊은 나이에 위험을 무릎쓰고 애국심 하나로 문재를 발휘하여 ‘기미독립선언서’란 조선역사상 불후의 문장과 지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위험을 당해보지 못하고 이데오르기에 붙잡힌 후세의 호사가들에 의하여 아직도 매도되고 있다는 것은 민족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거슬러 진심을 꿰뚤어볼 수 있는 혜안과 애정이 요구된다.

(정리 김상신)

<한국의 인간상 6권 근대선각자 편, 신구문화사 편. 조용만의 최남선 참조>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22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안병무  2191 05/13-07:41
21   <특집-4.19(시와 가족수기>  2727 05/13-07:38
20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  3441 03/30-15:59
19   함석헌의 <3.1 정신>  2835 03/28-23:00
18   시(詩)로 본 미래전략-이어령(김소월의 '엄마야 ...  3346 03/13-00:17
17   '6.25가 국제 공산주의 붕괴의 출발점이었다."-...  2738 07/11-18:34
16   독립만세 선창자 의암 손병희  3003 03/28-11:29
15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이재철  3580 10/11-16:37
14   신라불교의 첫 순교자 이차돈-이재창  3631 06/10-11:13
13   유동식 교수의 <한국 문화와 기독교>  2232 03/13-11:45

 
처음 이전 다음       목록 홈

ⓒ Copyright 1999~   TECHNOTE-TOP / TECHNOTE.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