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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28(월)
독립만세 선창자 의암 손병희  

<늘푸른나무/한국관련 글들/2011년 3월>

독립만세의 선창자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독립선언 33인의 대표로 3.1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이끌었던 손병희는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이조 철종 12년 (서기 1861) 4월 8일에 청주 아전(지방관청의 말단 하급관리)인 손의조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아명은 응구(應九), 병희는 동학에 입도한 후에 불려진 이름이고, 의암은 은사 최해월 에게서 받은 도호(道號)이다.

유소년 시절

어렸을 때부터 장난이 심하고 엉뚱한 짓을 잘하여 ‘천실소생(賤室所生)이라 할 수 없다”는 동네어른들의 욕설을 들으면서 서자의 천시와 괄시를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고 자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거세졌다.

그러나 그의 범상함을 가늠케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열 두 살 때 지방 관리로 있는 전실소생 형님의 심부름으로 상급관청인 청주고을에 공금을 바치러 가는 중이었다. 마침 길가던 사람이 길가에 딩굴며 신음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객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짊어지고 가던 공금을 몽땅 주면서 환자의 치료를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심히 꾸중을 들었다.

17세 때 하루는 음성 고을의 어떤 촌락을 지나다가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수근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건너편 산 밑에 있는 집에서 괴질로 다섯 식구가 차례로 몰살을 당한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송장을 매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기는 하였으나 모두 겁이 나서 서로 얼굴들만 처다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내가 해줄 테니 걱정마시오” 하고는 그 집으로 들어가 다섯이나 되는 송장을 염습하고 매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저 사람이 무사하겠나?”염려하였는데 다행히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소년의 반항적이고 거친 삶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서자가 공부해서 무엇 하느냐?며 지방의 불량배들을 모아 거들먹 거리는 양반이나 세도가들을 혼내 주며 지내다 16살 때 양반을 팬 것 때문에 결국 관아의 눈을 피해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술 마시고 투전하고 사람 때리는 불량배의 생활이 여전하여 청주와 괴산 일대에서는 손응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에 입문하다.

그가 스물한 살 때 동학에 가담하게 된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에 경주사람 최제우가 창시한 새로운 종교로 당시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문란하며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는 가운데 유교와 불교는 쇠퇴하여 가고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민중들에게 다가가려 하는 환경가운데서 서학에 대립되는 민족고유의 종교로 제세구민(濟世救民) 하겠다는 깃발을 들고 유,불 선, 의 교리에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요, 인심이 천심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지상 천국, 만민 평등이라는 이상을 표방하고 동학이라고 하였다.

청주지방에서도 동학이 전파되어 비밀리에 퍼지고 있었는데 조카 되는 손천민이란 자가 의암을 찾아와 동학은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면하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도’니 믿어보자며 권고하였다. 이에 대해 의암은 “재난은 자기의 판단에 의하여 지혜스럽게 하면 면할 수 있고, 질병은 섭생을 잘하면 아니 날 것이요, 인명은 천명이며, 일생일사는 천지의 상도라. 어찌 동학을 믿어서 내 일신만의 장수(長壽)를 꾀한단 말이오? 동학의 목적이 그것만이라면 나는 믿기를 원치 않소”라고 일축하여 버렸다고 한다. 이에 동학에서는 서우순이라는 수령을 다시 의암에게 보내어 동학의 깊은 진리를 설명하였다. “동학은 삼재팔난, 무병장수만을 위한 도가 아니라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이 인간은 다 평등할 뿐 아니라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대도(大道)입니다”고 설명하자 “나라를 돕고 만민을 평안히 살게 하며, 널리 창생을 구제하는 일이면 내 일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겠소” 하면서 동학에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서자출신으로 온갖 수모를 당했던 의암은 이 세상에는 진리도 없고 정의도 없고 도덕도 없는 말세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런 세상이 빨리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이나 동학에 입도한 후 이것이 진리요, 정의요 도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자신이 동학에 의하여 훌륭한 인격을 도야하고, 국권을 확보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새 나라를 이룩하고 또한 동학에 의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새 세상을 수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술을 끊고, 도박을 끊고 동지였던 불량배들과의 교제도 완전히 끊었다. 그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짚신을 삼아 팔아 연명을 하였다.

그의 특이한 기질과 수도에 대한 열성이 두각을 나타내자 24세 때 교주 최해월을 만나게 되었고 의암의 범상함을 안 해월은 자신의 곁에 두고 그를 직접 지도하여 의암은 수도 7,8년 후에는 해월의 3인 수제자 반열에 들게 되었다.

동학은 나라가 금하는 대상이었지만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1891년(고종 28년)에는 1863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초대교주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였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강경론자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특히 전라도의 전봉준(全琫準)이 전라도에서 실력 행동으로 나갈 뜻을 보이자 교주 최해월은 손병희를 전라도에 보내어 전봉준을 만류하려 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3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관아를 습격하고 세미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등 민란이 일어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전봉준은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외(斥洋斥외)를 부르짓으며 봉기, 동학란의 시발이 되었다. 전봉준이 농민군을 데리고 정부군들과 싸우는 동안 이들의 진압을 구실로 일본군과 청나라 군사들이 들어와 청일정쟁 일보전의 상황이 되었고 명성왕후의 죽음과 대원군의 재집정 등,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은 항일구국의 의거를 다시 일으켰다.

이때까지 최해월이 이끄는 동학교는 전봉준이 이끄는 난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봉준이 항일구국(抗日救國)의 깃발을 들고 다시 봉기를 하자 의암은 최해월에게 더 이상 참지 말고 의거게 참가할 것을 건의하였다. 최해월은 “인심이 천심이니, 이것이 天明이로구나 “ 하고 전 동학군에게 동원령을 내려 전봉준과 합세 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목적을 달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1894년 9월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내려주어 北接 동학군의 총 지휘권을 맡겼고 南接에서는 전봉준이 총책이 되었다.

부패한 양반세력 타도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에 항거한다는 민족적 대의 앞에 동학군은 하나가 되어 궐기한 것이다. 손병희와 전봉준은 의기가 투합하였고 의형제를 맺고 전투에 임하여 관군들을 패퇴시켰으나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군의 본격적인 개입과 함께 그들의 병기와 전략 앞에 농민들로 구성된 동학군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패전하고 말았다.

1894년 전봉준은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졌다가 교수대에서 사라졌으며 교조 최해월도 관에자수 하였으나 혹세무민(惑世誣民)하였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최해월은 체포되기 전인 1897년 12월 24일 원산 및 관서지방에 피신해 다니면서 동학의 재건과 포교에 큰 공을 세운 의암 손병희에게 동학대도(東學大道)의 장래를 물려주었다. 비록 관리들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형편이었지만 의암이 제3대 교주에 취임한 것이다.

외국 유람과 갑신개혁 운동

교주 최해월이 순도한 후 의암은 교도의 집으로 숨어 다니면서 동학을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개화파 인물들을 만나 동학을 권하여 몇몇은 입교시키는 한편 그는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참에 숨어 다니며 포교를 하는 것 보다 도리어 해외에 나가서 견문을 넓히는 것이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01년 3월 안경장수로 변장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란 가명으로 경찰의 눈을 피했으나 당시 중국정부는 조선 정부와 발을 맞추던 때여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도꾜와 오사까에 머물렀다.

도꾜에 머무는 동안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이들과 조국의 불운을 개탄하고 국운 회복을 논하기도 하였다. 후에 오세창은 의암에 대하여 “김옥균, 유대치 등 여러 선생은 소년시대부터 친교 하여 잘 아는 바이나 조선에서 인물을 뽑자면, 그 위대함에 있어서 손병희 선생을 제일 가는 분으로 안다”고 하였다.

의암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본국에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하게 하였다. 1903년 1월 조선에 돌아와 1차 유학생 24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데려 갔으며 그 다음해 2월에는 40명의 유학생을 데려가는 등 그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도합 64명의 유학생을 길러내었다.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국은 조선에서 물러나고 일본의 강권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행되면서 조선에는 커다란 변화와 혼란이 일어났다. 명성왕후의 시해(을미사변)와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일본과 러시아 간에는 전쟁을 한발 앞둔 상황이었고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개화파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견문을 익힌 의암의 판단으로는 전쟁이 나면 러시아는 패퇴하고 일본천하가 될 터인데 조선정부는 일단 일본과 손을 잡고 전후에 전승국의 지휘를 이용하여 국권확보를 꾀하도록 하고 조선에 강력한 정당을 만들어 국민들의 생활을 혁신하고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의암은 일본에 있으면서 권동진, 오세창 등과 의논하여 <진보회>라는 정당을 만들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어 조선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개화의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개화파의 친일 세력들이 중심이 된 <일진회>와의 통합으로 ‘진보회’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변질되는 것을 보고 의암은 1907년 조선으로 돌아와 동학의 전통을 잇는 ‘천도교(天道敎)”를 새로이 선포하였다.

귀국후의 사회활동

의암의 ‘천도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 ‘시천교(侍天敎)”이다. 의암은 교단의 재건을 위해 지방순회를 하면서 옛 교인들을 복교토록 하여 어느 정도 옛 교세를 회복하였다. 한번은 지방 순회중에 지방의 애국지사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일파에 의해 머리에 자상을 입었다. 마침 범인이 곧 체포되었으나 “그 사람이 나를 해하려고 한 것은 오해에서 기인한 우국충정의 소치이니 그를 처벌하지 말고 석방하도록 하라”고 당국에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국운은 더욱 쇠하여가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일을 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 또는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암은 천도교의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는 한편 보성사라는 출판사도 만들어 출판사업을 통해 내밀히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나 이때부터 의암의 행적은 수수께끼이다. 쌍두마차로 서울 장안을 누비면서 요정의 연회와 한강 선유 등, 유흥과 향락으로 소일하였으며 자연히 사회의 비난과 공격이 빗발쳤다. 그것은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에까지도 알려져서 그에 대한 논란과 욕설은 끝이 없었고 사회적인 명망도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의암에 대한 일본의 감시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놓고 의암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꼼작 달싹 할 수 없는 일본의 감시아래서 그들의 눈길을 피해 일을 계획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연막전술이었다고 두둔하면서 3.1 만세사건을 주도한 그의 업적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의암이 별 감시를 받지 않고 기미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앞을 내다보고 미리미리 그러한 연막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1. 만세운동과 의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인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民族自決)원칙’을 선포하였다. 즉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종교단체, 청년, 학생 층에서 독립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심이 흉흉했다.

이때 의암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을 불러 때를 잃지 말고 거사할 것을 지시하고 1. 거족적으로 방법과 행동이 일치한 단일 운동. 2.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선포하는 군중시위 운동. 3. 감정에 흐르지 말고 질서정연하게 우리의 의사를 공명정대하게 발표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최린이 처음에는 사회적인 저명인사 중심으로 박영효, 이용구, 한규설, 윤치호 등에게 교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종교계로 방향을 바꾸어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측 2인 등으로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되었다. 의암은 거족적인 운동이어야 한다며 매국노라고 지탄받는 이 모, 송 모 까지도 직접 만나 의사를 타진하였다는 3.1 운동 비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으며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폐쇄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천도교월보>를 발행하며 끝내 지키고 있던 보성출판사에서 3.1 운동 때 밤새 독립선언서를 인쇄함으로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서울과 주요 도시에서 일본 경찰들도 모르게 성공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인 33인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의암은 3년 형을 선고 받고 생명이 위독하여 보석으로 출옥, 치료하였으나 별 효험을 보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언론기관들은 호외를 발행하여 ‘큰 어른의 가심’을 알렸다.

“나는 가니 뒷일은 청년들에게 부탁한다. 일본이 절대로 조선을 아주 먹지는 못한다. 반드시 독립을 회복할 터이니 낙심 말고 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인 권동진, 권병덕, 신흥식, 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청원군 생가 자리에는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어린이 날을 제정한 것으로 알려진 방정환이 의암 손병희의 사위이다.

(신구문화사 간 '한국의 인간상 6권'에 수록된 백세명의 '독립만세의 선창자 손병희'를 주로 참고하여 정리하였음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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