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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10(목)
신라불교의 첫 순교자 이차돈-이재창  

<늘푸른나무/논설과 해설/2010년 5월>

신라불교의 첫 순교자 이차돈(異次頓)-이재창

고유신앙과의 충돌

5세기의 신라사회에서 재래의 고유신앙은 완고한 보수(保守)의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웃나라인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반미개사회에서 볼 수 있는 미신종교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보수의 벽은 <폐쇄된 사회>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폐쇄된 사회는 배타적인 편견을 그 특징으로 지니고 있었다.

불교가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잘 받아들여졌는데 신라에 와서 수난을 당하게 된 까닭은 이와 같은 폐쇄된 사회의 배타적 기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당시 중국의 고급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등종교였지만, 고유신앙에 흐려 버린 보수의 거울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로 비쳐졌던 것이다. 더구나 괴이한 옷차림에다 머리까지 깎아 버린 모습으로 이상한 교리를 지껄이는 불교 포교사(僧侶)들의 언동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눌지왕 때부터 고구려와 접경되어 있는 지역에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오는 승려들이 더러 있었다. 따라서 자연히 신라 북쪽 국경지대의 민간에는 불교가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고구려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인선군(人善郡)에는 모례(毛禮)라고 하는 불교신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신라에 들어오는 불교 승려들로부터 감화를 받고 있었다. 국경선을 넘나드는 승려들은 어느덧 한번씩은 모례의 집을 거치게 되었고 모례의 집은 불교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래되는 거점이 되고 말았다. 때때로 재래신앙의 광신자들의 위협으로 승려들의 신변이 위태로울 때면 모례의 집은 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눌지왕 때에 하루는 아도(阿道)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월경해 왔다. 그는 어려서 위 나라로 건너가 현장 화상에게서 불도를 닦고 불교를 전하기 위해 밀입국하였던 것이다. 아도는 모례의 집에서 한동안 숨었다가 신라의 수도로 올라갔다. 신라왕에게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청원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미움이 심하여 견디지 못하고 모례의 집으로 돌아와 숨어 지내기를 3년을 하였다.

때마침 진(晉)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신라왕께 의복과 향(香)나무를 선물로 드렸다. 그런데 신하들은 아무도 그 향나무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풀어 향나무를 가지고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그 이름과 용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다. 아도가 마침 이것을 보더니 “이것은 향이라고 부르오. 이것을 피우면 그 향기가 분분하므로 성의를 신성(神聖)에게 올리는 것이 된다오. 이른바 신성이란 불타와 달마 그리고 승가를 가리킴이오. 만약에 이 향을 피우면서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그 무렵에 왕녀가 병을 앓았다. 왕이 아도로 하여금 향을 피워 빌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 이에 매우 기뻐한 왕은 불사(佛寺)를 세워서 불교를 일으키는 것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졌고 아도는 불법을 강(講)하였다. 그러나 그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귀족계급들이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고 아도는 신변의 위협을 피하여 다시 모례의 골방으로 숨었다.

아도를 비롯한 여러 포교사들의 전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에 자리잡고 있던 보수의 벽은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희생되는 사건을 통해서 폐쇄된 사회의 성문이 열리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이 바로 국민학교 때부터 들어온 <이차돈의 순교>이다.

창사(創寺)에 얽힌 비화(秘話)

이차돈의 성은 朴이요 자는 염촉(厭觸)이라 했다. 그의조상은 지중와의 생부인 습보갈무왕의 후예라 한다. 그는 신라가 아직도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지증왕 7년(서기 506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서 장성함에 따라 뭇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던 이차돈은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을 한탄하였다. 이웃나라인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정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진작부터 불교 수입에 따른 선진국의 문화를 섭취하고 있었다.

이차돈은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일찍부터 그는 법흥왕이 총애를 받고 있던 터였다. 인자하고 어진 법흥왕은 본래부터 불교에 관심을 보여 왔었다. 그는 항상 신라에서 불교를 한번 크게 일으켜 보리라는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차돈은 이러한 법흥왕의 뜻을 일찍 알아차렸다. 그는 신라에 불법(佛法)을 일으키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려고 언제나 애썼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대궐에서 법흥왕에게 불교포교의 문제를 끄집어 내었다.

“불교를 행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절을 세워야겠습니다. 소신으로 하여금 옛 성지인 천경림에다 큰 절을 하나 창건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법흥왕으로서는 재래의 무교에만 집착하는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어떻게 누를 수 있을 것인지가 고민이었지만 왕은 일대 용단을 내려 천경림에 절 짓는 공사를 허락하였다. 천경림은 백여년 전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흥륜사를 세웠던 곳이다.

이차돈은 불교를 일으킨다는 오랫동안 그리던 꿈이 실현된다는 데서 그의 정열을 모두 바쳐 사찰을 짓는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어둡게 하는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왕의 윤허로 공사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언제 신하들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 그때에도 법흥왕이 지금같이 꿋꿋하게 나갈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다.

만약의 경우에 부딪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이차돈으로 서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만약에 이 창사(創寺)의 불사(佛事)가 도중에 군신의 반대로 좌절된다면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이 불사만은 관철하리라고 결심했다. 불교를 위해서, 또 억만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그는 억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초연할 수가 있었다.

거룩한 죽음

그 해에는 유달리도 가뭄과 장마가 심해서 한재와 수재 때문에 농사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마가 들면서부터는 오 나라에 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백성들 사이에는 여러가지 흉흉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평소에 불교 전래를 반대하던 신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들은 상감이 불도를 가까이하고 요물이 궁중에 드나드는 까닭이라고 인심을 선동했다. 요물이란 물론 이차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드디어 군신회의가 결렸다. 회의는 온통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었다. 회의 벽두에 왕은 거침없이 소견을 밝혔다.

“이웃 나라 고구려나 백제에서 백여년 전에 불교가 행하여진 뒤로 나라가 날로 융성해지고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오. 그렇거늘 유독 우리나라만이 불교를 행하지 아니함은 심히 유감된 일이오. 나는 이제 우리나라에도 불교를 행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오.”

법흥왕의 말이 끝나자 당황한 군신들은 한때 동요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중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완강한 반대의견을 올렸다. 그들은 죄를 입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왕명을 따를 수 없다며 만일에라도 지금 그와 같은 상도(常道)를 벗어난 교를 받아들인다면 나라를 위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왕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이차돈은 군신들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군신들은 마침내 절 짓는 문제를 들고 나왔다.

“천경임에 절을 짓는 공사를 벌인 책임자를 밝혀 내어서 처단해야 하오.”

이때 이차돈은 결연한 태도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절은 이 몸이 단독으로 지으려 한 것이오. 상감마마께서는 이 일에는 아무런 아시는 바가 없으시오. 이 몸이 혼자 생각으로 일으킨 공사요. 책임은 이 몸 한 사람에게만 있소.” 라 하여 그는 혼자 책임을 지고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법흥왕 14년(서기 527)에 일어난 일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형을 받을 때 이차돈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부처님이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은 후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했다 한다. 목을 베었더니 젖 같은 흰 피가 솟아나고,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꽃 비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전설의 사실 여부가 어떠하든 그 후로는 부처님을 훼방하는 일이 자취를 감추고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그의 순교가 신라역사상 길이 빛을 발하는 이유이다. 이차돈의 거룩한 희생이 있은 이듬해인 528년에 법흥왕은 신라에서 불교를 국교로 승인할 것을 선포하였다.

홍륜사 창건 공사는 진흥왕 5년(서기 544년)에 완성을 보았고 그 금당(金堂)에 십성(十聖)을 모실 때 이차돈도 그곳에 보셨다.

그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의 순교장면을 상징하는 육면 석당(六面 石幢)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맨 위의 사진)

<한국의 인간상(3권)-종교가, 사회봉사자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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