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8
2010/9/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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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제2절 클린턴 시대의 개막과 전개과정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10년 9월>

제9장 20세기의 막을 내리며

제2절 클린턴 시대의 개막 과 전개과정

클린턴의 42대 대통령 당선

미 중남부 알칸소(Arkansas) 의 주지사 출신인 Bill Clinton은 제2차 대전 이후인 1946년에 출생한 ‘베이비 붐 세대’입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풍요가운데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세대, 그렇기 때문에 애송이이고 조금은 유약한 세대’라는 뜻을 지닌 베이비 붐 세대의 크린톤이 부통령 후보 알 고어와 함께 FBI 총수 출신에 요직을 다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현직 대통령 부시를 단임대통령으로 눌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1992년의 대통령 선거는 부시와 클린턴의 대결보다는 제3당 후보인 H. Ross Perot의 등장으로 더욱 흥미롭고 관심을 끄는 선거가 되었습니다.

1930년 생인 텍사스의 페로는 그의 Electronic Data System을 통해 정부와의 계약을 따내어 억만장자가 된 사람으로 정부를 개혁하여야 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무소속으로 대통령에 출마하였습니다. 그의 촌스러우면서도 하면 된다는 식의 선거운동은 차이점이 별로 없이 누가 선거자금을 더 많이 모으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양당제도에 식상한 수백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43 % 대 37%의 접전에서 페로와 제3당 후보들이 19%를 차지했다는 것은 부시의 패인이 제3당 후보들의 바람몰이에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린턴은 의회와의 하니문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공화당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에서의 동성애 금지 조항 철폐’ 약속이 공화당의 집요한 반대로 “don’t ask don’t tell’ (묻지도 말고 이야기 하지도 말라)로 어정쩡하게 결판이 나자 공직자 임명, 비준과정에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으며 주지사로 있던 알칸소에서의 Whitewater 사건(힐러리 클린턴이 관련되었다고 알려진 부동산 사건)등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1993년부터 놀랍게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클린턴의 과감한 적자줄이기 정책이 효과를 보아 사태는 호전되어 가는 듯 했습니다. 클린턴은 선거공약이었던 <건강보험 개혁안 심의>를 위해 부인 힐러리 클린턴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의욕을 보였습니다만 의회와 업계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1994년의 중간선거에서 악재로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공화당은 1994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죠오지아의 하원의원 뉴트 킹그리치(Newt Gingrich) 주도하에 <미국과의 계약(the Contract with America)>이라는 공약을 내걸고 클린턴의 민주당에 맞섰습니다. 그들의 약속이란 극우적인 보수당의 정책으로 ‘균형예산을 위한 헌법수정, 국방예산 증가, 의원 임기 제한, 합법적인 낙태종식을 위한 헌법수정, 사회복지제도의 개혁’ 등으로 보수층의 지지를 끌어 내어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40년 만에 하원에서 다수당의 자리를 확보하면서 다음 대통령 선거를 위한 포석을 든든히 만들어 놓았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클린턴은 기죽지 않고 도리어 공화당의 <미국과의 계약>을 역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반전시켰습니다. 그는 민주당의 정책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필요하면 과감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흡수함으로써 정책적으로 제3의 길을 가는 신 민주당이라 불리었습니다. 그는 카나다와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을 과감하게 수용하였고 사회복지제도 같은 것은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보다 한 발 앞서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섬으로 자신의 업적으로 바꾸어 인기를 만회하였으며 백악관 인턴 모니카 루윈스키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음에도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클린튼은 민주당으로서는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8년 연속 대통령이 되었으며 임기 동안 평화 시에는 처음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그의 8년 임기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처음으로 국가재정이 흑자를 기록하였습니다.

클린턴의 성(sex) 스캔들과 탄핵재판

이러한 대통령으로서 성공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클린튼은 임기 내내 여자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변화된 매스컴 문화와 본인의 신중하지 못한 처신이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출마했을 때부터 부인 힐러리 여사와 함께 나와 여자관계를 해명하는 수모를 당했던 후보자 클린턴은 당선 후에도 1994년 성적인 희롱을 당했다는 알칸소 여인 죤스( Paula Corbin Jones)의 고소 건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것은 힐러리가 개입되었다는 주지사 시절의 부동산관련 스캔들과 그의 보좌관 Vincent Foster의 자살로 한때 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크게 문제가 되었든 것은 그전부터 입 소문이 났었으나 1996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 터진 백악관 인턴 루윈스키 사건입니다. 모니카 루윈스키(Monica S. Lewinski)는 1995년부터 1997년 3월까지 백악관 인턴으로 근무하였는데 그때 클린턴의 집무실에서 사람들이 보통 ‘sex(성)’라고 말하는 관계가 몇 차례 이루어졌으며 그 증거물이 있다는 폭로였습니다.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클린튼은 끝까지 ‘성관계는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을 뿐이라는 알송달송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1998년 12월 미의회는 클린튼이 특별검사에게 거짓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짓말을 하도록 하였다는 두 가지 항목으로 탄핵안을 제출하였습니다. 1799년 이래 미 의회는 15건의 탄핵안을 심의 처리하였지만 대통령의 탄핵안을 다룬 것은 앤드류 죤슨 대통령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수회(收賄)나 반역(叛逆)에 한하여만 한다며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1999년 정월 렌퀴스트(William H. Rehnquist) 대법원장 주재 하에 상원에서의 심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탄핵안의 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위증은 아니지만 거짓된 성명을 만들었으며 변호사 면허증을 반납한다는 것을 전제로 현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한다는 불명예스러운 조건부 부결이었습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클린튼의 인기는 계속 올라갔고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퇴임하였으며 퇴임 후에도 계속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2008년 힐러리 클린튼이 대통령 후보로 오바마와 박중 세를 보인 것 역시 클린튼의 대통령으로서의 인기가 적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해답은 ‘경제’에 있었습니다. 부시와 클린턴의 TV 맞대결에서 ‘계란 값을 아느냐’는 질문에 부시가 우물쭈물할 때 클린턴이 정확하게 값을 알아 마침으로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문제는 경제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당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클린턴은 과감하게 경제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것은 운 좋게도 효과를 보였습니다. 전쟁과 같은 특수 경기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요인이 없는 평화 시에 경제가 계속 성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기록이 나타났습니다. 국가가 적자로 은퇴자 복지기금이 고갈된다는 아우성 속에서 출범했지만 해마다 부채가 줄어들었고 마지막 해에는 흑자로 돌아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증권시장은 나날이 오르면서 호황을 가져왔습니다. 자연히 돈을 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대통령이 바람 좀 피우는 것이 대수냐! 정치 잘하고 살기 좋으면 됐지!” 하는 생각이 개방적인 성문화와 어울려 클린턴의 성 스캔들이 별 주의를 끌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공화당 의원들의 스캔들이 고비마다 터지면서 클린턴의 성 스캔들을 희석시키는 효과마저 가져왔습니다.

연방준비은행과 앨런 그린스팬 의장

그러나 클린턴의 행운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방준비 은행의 의장인 앨런 그린스팬(Allan Greenspan)을 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린스펀이 연방준비은행의 의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방준비은행이 무엇 하는 기관인지 의장이 누구인지를 아는 미국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꼽히게 되었고 그의 한 마디, 한 동작은 고대 희랍, 델피신전의 신탁과도 같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한 사람의 행운이 달려 있을 뿐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가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방준비은행(The Federal Reserve Board)은 1913년에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독립된 정부 규제기관으로 나라의 경제를 유연성 있고 안정되게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주 임무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의 통화를 관리하고 통화정책을 수립하는 권한(통화량의 수급을 조절하는 일을 말함)을 갖게 되었으며 은행을 규제하는 권한도 갖게 되었습니다. 1978년에는 연방준비은행이 안정된 물가를 유지하고(인프레와의 전쟁을 의미) 고용을 극대화 하면서 경제성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야 할 임무까지 부여 받았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경제성장은 좋지만 지나친 성장은 좋지 않으며 고용확대가 좋지만 완전한 고용 역시 좋지 않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어 왔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지나치면 부작용(인프레와 노동시장의 경직)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여기에서 그러면 ‘지속 가능한 성장’과 ‘고용 극대화’라는게 무엇이냐?하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 연방준비은행에 맡겨진 주 임무가 된 것이다. 와싱톤 DC에 본부를 둔 연방준비은행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상원의 인준을 받는 7명의 이사진들과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장과 부의장은 4년 임기에 대통령 지명에 상원의 인준을 받게 되어 있는데 비하여 일반 이사들은 14년 임기로 종신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정부에 신경 쓰지 말고 중장기 경제지침을 만들어 내라는 의도였지만 의장은 정치바람을 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 역시 연방준비은행의 조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아버지)이 재선에 실패하고 나서 연방준비은행장이 자신의 경제정책을 적극 밀어주지 않은 게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알란 그린스팬은 1987년 공화당 대통령 레건에 의하여 민주당 출신 볼커(Paul Volcker) 의장의 후임으로 지명되었습니다. 볼커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인프리션 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인플레 잡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카터 정부의 경제정책이 제 기능을 못하여 결국 카터가 낙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레건은 공화당원 경제인 가운데서 후임자를 찾았고 1926년생으로 경제공황을 경험하고 1950년대에는 재정 상담역으로 돈도 번 경험이 있으며 1970년대에는 포드 대통령의 재정고문역을 담당했던 알란 그린스팬을 지명하였습니다.

그가 1987년 8월 연방준비위원장으로 취임한지 2달 만에 ‘87년의 대란’이라고 부르는대공황 이후 최악의 월 스트리트 금융위기가 닥쳐왔습니다. 10월 어느 날, 하루 동안에 다우존스 지수가 22%에 이르는 508 포인트가 떨어지면서 대공황 이후 60여 년 만에 증권시장이 붕괴되고 은행제도가 몰락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스팬은 다음날 아침에 연방준비은행이 모든 은행들이 제대로 청산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있음을 강조하고 발 빠른 수습에 나섬으로 대 공황 때와 같은 금융기관의 붕괴를 막고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월 스트리트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그에게는 더욱 큰 힘이 주어졌으며 미국경제계에는 그린스펀 시대가 열렸습니다.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금리를 변경할 때마다 투표로 결정하던 것을 의장이 시기와 인상율을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위험할 정도로 점점 더 그에게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다행이 그런 힘을 바탕으로 그린스펀은 신속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신뢰들이 어울려 미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발전할 수 있는 국제적인 위기들을 잘 넘겼습니다.

그린스펀은 국내 경제정책에서 반 인프레 정책을 기저로 금융계의 신뢰를 얻어내 탄탄한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습니다만 아이러니 하게도 빠른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부시 정부는 국민들의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여 결국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아이로닉 한 것은 그린스펀이 닦아놓은 경제적인 기반이 클린턴이 취임한 이후부터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클린턴의 적자감소 정책이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과 맞물리면서 정부의 적자는 줄어들고 증권시장이 활기를 띠고 증권투자를 통한 수입이 늘어나면서 클린턴 정부는 더욱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린스펀은 클린턴과 부시(아들) 정권을 거치며 5차례나 연임하면서 강력한 연방준비위원장으로 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20여 년 임기 중 미국경제가 안정적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클린턴 정권 말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1,000 포인트를 넘어섰던 증시의 다우존스가 2000년에는 9,000대로 떨어졌으며 은행들이 통폐합을 거듭하면서 천정부지로 오르던 부동산 시장에도 경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린스팬이 만들어 놓은 많은 규제조치들로 인하여 1929년과 같은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우려했던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2007년의 미국경제 침체로 이어졌습니다. 경제침체의 원인을 레건 대통령이나 스린스펀 의장에게 돌리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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