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6
2009/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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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새로운 미국-시대는 바뀌었다.(요약)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1월 15일>

제8장 새로운 미국-시대는 바뀌었다.(1960년대부터 80년대)-요약


*새로운 세대, 케네디 대통령의 출현-19세기에 출생하여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며 공로를 세운 세대들이 주도하던 정치권력이 20세기에 출생한 40대의 손으로 옮겨가는 획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부통령으로 공화당의 후보가 된 닉슨이나 민주당의 후보로 나타난 케네디 역시 40대로 치열한 선거전 끝에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의 젊은 이미지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 한층 돋보이며 새로운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도 대단하였다.

“미 국민들이여, 국가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며 1961년 3월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정책들을 펼쳐나갔지만 지나친 의욕과 반 공산주의 강박관념으로 미국외교사상 가장 위험한 외교적인 실수들을 거듭하다가 암살로 마감하고 말았다.

*피그만 사건 –케네디의 실정은 큐바에 대한 섣부른 침공계획으로 카스트로의 큐바를 미 대륙에서 쏘련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유일한 공산국가로 전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큐바 미사일 위기’ 같은 사태를 자초하였으며 그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권운동 -1920년 수정헌법 19조의 통과와 인준으로 여성 참정권이 확정된 후로는 이렇다 할 여성인권운동이나 여성들의 지위변화가 없었는데 1960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함께 직장을 찾는 여성들이 증가하였고 그것은 남녀 평등 내지 여권운동으로 번져갔다. 거기에는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란 책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지적 하고 있다. 수 백만 부가 팔린 이 책을 통해서 여성들이, 특히 중산층의 백인 여성들이 아내와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잠재적 욕구에 일단 불이 댕겨지자 당시 거세게 불던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연계되면서 미국사회에 여권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여기에 맞추어 ‘여성지위 연구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구성하고 1964년에는 여성도 연방의 차별대우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64년 흑인들을 위한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될 때 “인종, 색갈, 종교, 국가” 에 ‘性(성)’을 추가함으로 여권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흑인 민권운동-1950년대 중반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하는 비폭력 저항운동과 법정투쟁으로 자리를 잡아 가던 흑인 민권운동은 마틴 루터 킹의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로 유명한 1963년 8월 와싱턴의 링컨 광장에서 열린 100만 명 집회와 1964년 6월 죤슨 대통령이 서명한 ‘민권 법’ 그리고 킹 목사의 1964년 10월,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케네디가 암살당하는 등 폭력의 시대가 열리면서 특히 남부에서는 흑인 지도자들이 암살당하고 흑인교회가 폭파되며 행진하던 여학생들이 백인들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등 적지 않은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그런대로 효과를 거두면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의 정형으로 자리 잡는 듯 했던 킹 목사와 SCLC나 NAACP 중심의 평화적이고,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서의 민권운동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단체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미온적인 킹 목사의 행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과격한 말콤 X의 언동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죤슨의 취임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미국-케네디 대통령의 유고로 잔임 기간을 승계한 존슨은 1년 앞으로 다가 온 선거를 준비하여야만 했다. 공화당 보수주의자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 맞서 빈곤과 인종적인 불공정을 종식시키고 ‘위대한 사회’를 구현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경제적, 교육적 개혁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 버릴 것을 다짐한 존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선 후 그는 과감한 입법활동을 통해 자신의 ‘위대한 사회’의 이상을 실현해 나갔다. 케네디 대통령 때 제안되었든 ‘민권 법’을 통과시키고 직업 알선기구들을 만들고 메디케이드, 메디케어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 딜정책 이후 가장 야심적인 사회 개혁 정책을 시행하여 국내에서는 큰 공헌을 하였지만 베트남 문제에 점점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상황가운데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패한 존슨은 3월 31일 대통령 후보불출마를 선언하고 4월 4일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가 하면 6월 6일에는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가 암살당한다. 그 해 11월 6일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닉슨이 민주당의 험프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월남전의 종식-1969년 닉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키신저 안보보좌관의 주도하에 수렁에 빠진 베트남 전쟁 수습책이 마련되었고 양측간에 끈질긴 협상이 계속되었지만 미군의 일방적인 철수에도 불구하고 1974년에 들어서자 월남의 대통령은 전쟁이 재개되었다고 발표하고 전쟁을 계속하다가 1975년 월맹과 베트콩의 월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6개월여의 대 공세 끝에 4월 1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23일에는 포드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하고 월남의 고위 공직자들과 민간인들을 철수시키는 가운데 4월 29일 공산주의 군대가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 20여 년 동안 미국이 개입하였든 월남전은 월맹과 베트콩의 공산주의 군대에 의한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0여 년 미국 역사상 처음 겪은 불명예스러운 패배였지만 미국은 1982년 11월 와싱톤에 베트남 참전기념비를 제막하고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월남에서 전사한 5만 8천명의 미군 이름들을 조각하여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

*달에 처음 착륙한 우주인 암스트롱 -미국에 앞선 쏘련의 첫 우주선 스푸트닉호의 성공에 황당해하는 미국인들에게 10년 내에 달 착륙우주선을 개발하겠다고 약속한 케네디 대통령의 약속대로 미 우주항공국은 1969년 7월 20일 네일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버츠 알드린(Buzz Aldrin)이 탄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하고 전 세계가 TV를 통해 주시하는 가운데 미국국기를 달 표면에 꽂았으며 “여기 지구에서 온 사람들이 1969년 7월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뎠으며 우리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이곳에 왔다”는 팻말을 남기었다.

이로서 미국은 쏘련에 당했던 수모를 말끔히 씻어냈으며 암스트롱의 말대로 “한 인간에게는 조그마한 발걸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류에게는 큰 진전”을 가져다 주었으며 미국인들에게는 잃었던 자부심을 다시 찾게 하는 통쾌한 쾌거였다.

*우주선 챠렌저 호의 비극 -1969년 7월 일 20일, 미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것은 미국의 자존심을 한 껏 고양한 쾌거였지만 1986년 1월 28일의 채린저호의 궤도진입 실패는 전 미 국민은 물론 온 세계가 애도한 비극이었다.

NASA의 달 탐사계획인 아폴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계획된 우주선 발사는 스코비(Francis Scobee)를 선장으로 5명의 승무원들이 탑승한 25번째의 탐사여행이었지만 특별히 선발된 고등학교 교사 맥우리프(Christa McAuliffe(두 아이의 어머니)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승하게 되어서 특별한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리다의 나사 기지에서 발사된 지 73초 만에 4만 6천 피트 상공에서 온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불덩이로 변하여 낙하하고 말았다.

*닉슨의 집권과 워터게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강력한 보수정치인으로 명성을 쌓아 온 닉슨은 케네디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하고 “다시는 나에게 발길질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캘리포니아로 낙향하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하루 하루 베트남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 죤슨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으로 현역 강력한 후보가 사라진 자리에 닉슨은 재기를 꿈꾸며 공화당의 후보로 선출되었고 ‘월남전 종식’을 공약으로 그 해 11월 민주당의 험프리(Hubert Humphrey)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특사로 베트남전 종식을 위해 월맹과의 막후 협상을 벌이는 한편 월남전은 월남군인들에게 맡긴다며 과감한 미군 철수를 단계적으로 시행하였다. 햔편 국내적으로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의 입지를 굳히면서 닉슨 행정부안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든 닉슨을 보호하고 재선시켜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다.

197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6월 17일 와싱톤 디씨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 사무실에 5명의 괴한들이 침입했다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통령재선위원회의 직원신분증을 소지하고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하고 기밀 선거전략 문서들을 훔치기 위하여 침입한자들로 그 가운데에는 전 FBI요원도 들어있었습니다. 국민의 반수 이상이 워터게이트 침입사건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시행된 11월 7일에 선거에서 닉슨은 민주당의 맥거번(George McGovern)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재선된 닉슨 앞에는 <워터게이트>사건을 분명히 밝히라는 여론의 압력이 빗발쳤고 의회는 조사를 통해 탄핵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3년 10월에느 애그뉴(Spiro Agnew) 부통령이 매릴랜드 주지사 시절의 세금포탈사건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닉슨은 당시 하원공화당 총무인 포드(Gerald Ford)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닉슨은 다음해(1974년) 8월 5일 “민주당사 침입사건 6일 후 닉슨이 이 사건에 대한 FBI 수사를 중단하도록 명령한 테이프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공개 시인하고 사흘 뒤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고 8월 9일 캘리포니아로 떠났으며 부통령 포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포드 대통령은 8월 21일 뉴욕 주지사인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9월 8일에는 “닉슨이 대통령으로 재임 시 행하였거나 행하였을 수 있는 미국헌법에 대한 모든 범법행위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허용한다”는 특별사면에 서명함으로 닉슨을 둘러싸고 2년여 동안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든 워터게이트 사건은 막을 내렸다.

한 정치가의 과도한 야욕과 집착,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집념 그리고 거짓말로 점철되었든 오욕의 역사가 의회와 언론의 끈질긴 추적 끝에 온 천하에 밝혀졌을 때 많은 미국사람들이 당혹하고 자괴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힘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부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중동정책-2차 대전 이후 50년대와 60년대 미국의 국제적인 최대 관심사는 쏘련과의 냉전으로서 주로 동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에 공산주의 쏘련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1948년 영국의 식민지 관활하 에 있던 팔레스틴 반도에 아랍계와 유대계를 분리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유엔의 결의 아래 이스라엘이 정식 국가로 건립될 때부터 이스라엘을 지원해 온 미국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간의 계속되는 충돌가운데서 60년대 말부터 70-80년대에 걸쳐 이 중간에 끼어 국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경제적인 기반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9/11과 이락 전쟁을 경험한 오늘에 와서는 미국의 가장 큰 잇슈가 되었다.

*OPEC에 흔들리는 미국-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랍 국가들은 서방의 대 회사들이 쥐고 있던 오일 통제권을 서서히 거두어 들였고 그에 따라 권력의 균형에 변화가 생겼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으로부터 1973년 욤 키퍼 전쟁까지 수 차례 아랍 연합국들과 싸우면서 서방에서 지원받은 우수한 장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지만 아랍국가들은 연합하여 1967년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한 압박수단으로 미국과 일본 및 서방세계에 대한 오일 수출을 제한하였고 그 결과 1970년대의 첫 번째 ‘에너지 위기’가 미국을 강타하게 되었다.

1960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 이락 베네주엘라 같은 세계의 중요 오일 수출국들이 OPEC(the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유류수출국 연합기구)을 구성하였지만 1973년까지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1973년 아랍 국가들이 공동으로 서방세계에 대한 석유수출을 보이코트 함으로 세계 석유산업과 그 연관사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세계 최대 석유소비국인 미국이 입은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1974년 3월 아랍국가들은 서방국가에 대한 오일 보이코트를 풀었지만 그들이 쥐고 있는 오일의 힘을 확인해 준 미국은 그 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카터의 대통령 취임과 이란 팔레비 왕조의 축출-1978년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1900-89)가 이끄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1954년 미국 CIA의 지원아래 정권을 장악하고 군사독재를 펴온 이란의 국왕 파라비(Muhammad Reza Shah Phahlavi, 1919-80)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자 미국에 대한 오일수출을 감소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펜실바니아에 있는 Three Mile Island의 원자력 발전소의 유출사고까지 발생, 에너지 부족이 심각하게 되었는데 OPEC 국가들이 가격을 인상하는 조치마저 취하였다.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세계 도처에서 반미 데모와 미국인 또는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가 번져가는 가운데 1979년 11월 4일 500여명의 이란사람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처들어와 90여명의 외교관들을 인질로 삼고 카터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카터 대통령은 경제적인 대책은 물론 아랍국들의 부당한 도발 앞에서도 뚜렸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미국은 힘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마는 듯한 인상을 세계에 주었다.

*AIDS와 미국사회-언제나 인간만이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닌 듯 하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변화를 가져온 것 가운데 하나는 후에 AIDS로 불리어진 일종의 성병이었다. 1981년 7월 3일 뉴욕 타임스는 “41명의 동성애자들 가운데서 희귀한 암을 발견하였다”는 제목 아래 알트만(Lawrence K. Altman) 박사의 보고서를 계제 하였는데 동성애자들이 일종의 알려지지 않은 치명적인 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 원인을 모르며 전염성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81년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20 여 년 동안 미국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은 물론 성(性)에 대한 태도나 성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에이즈는 미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20 여 년 동안에 전 세계적으로 수 천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아직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저개발 국가에서는 미래를 이끌어 갈 세대를 걱정해야 할 만큼 많은 어린이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과 통치_1980년 미국인들은 미국의 위신과 힘 그리고 강한 경제상황의 회복을 공약한 영화배우 출신이요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레이건(Ronald Reagan, 1911-)을 옛 스타일의 미국의 이상과 힘을 되살려 줄 인물로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취임 초에 경제회복 조치들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공약 시행에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경제정책도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했든 것 같았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오일 값이 내리고 미국경제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레이건의 기업규제 철폐나 반 트러스트 법의 철폐등 기업 친화적인 정책으로 경기는 되살아나게 되었고 거기에 세금감면의 덕으로 부자들은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경제 회복에 관한 한 레이건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미국에 닥친 유례 없는 경제적인 쓰나미의 단초 제공이 레이건 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배우출신의 그는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호감을 유발하는 데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지만 정책수행에는 별 관심이 없어 부하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버리고 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을 부하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게 내버려 둔 결과 그가 백악관을 떠난 후에도 계속 많은 행정관료들이 부패에 연루된 것이 발각되어 처벌받았지만 레이건은 계속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운 좋은 대통령’(Teflon President)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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