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5
2009/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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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제5절 레이건의 국내,외 정책과 사회상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9년 1월>

제 5절 레이건의 국내 외 정책과 1980년대의 사회상

AIDS와 미국사회

언제나 인간만이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변화를 가져온 것 가운데 하나는 후에 AIDS로 불리어진 일종의 성병이었습니다. 1981년 7월 3일 뉴욕 타임스는 “41명의 동성애자들 가운데서 희귀한 암을 발견하였다”는 제목 아래 알트만(Lawrence K. Altman) 박사의 보고서를 계제 하였는데 동성애자들이 일종의 알려지지 않은 치명적인 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 원인을 모르며 전염성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81년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20 여 년 동안 미국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은 물론 성(性)에 대한 태도나 성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학교에서는 AIDS에 걸린 학생들의 등교를 허용할 것이냐?로 논의가 분분하였고 교육용으로 콘돔을 나누어 주는 등 부산을 떠는가 하면 종교계에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부도덕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자비심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의견이 갈려 분분한 가운데 허드슨(Rock Hudson) 같은 유명배우들이 에이즈로 죽어가면서 에이즈에 대한 이해와 공포가 확산되어 갔습니다. 쉬쉬 하던 콘돔과 안전한 섹스가 공공연히 강조되었으며 골방에서나 이야기 하던 동성애 문제가 에이즈 위기와 함께 공개적인 농의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에이즈는 미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20 여년 동안에 전 세계적으로 수 천만 명이 목숨을 빼았아 갔고 아직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저개발 국가에서는 미래를 이끌어 갈 세대를 걱정해야 할 만큼 많은 어린이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에이즈의 원인에 대하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주선 챠렌저 호의 비극

1969년 7월 일 20일, 미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것은 미국의 자존심을 한 껏 고양한 쾌거였습니다만 1986년 1월 28일의 채린저호의 궤도진입 실패는 전 미 국민은 물론 온 세계가 애도한 비극이었습니다.

NASA의 달 탐사계획인 아폴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계획된 우주선 발사는 스쿠비(Francis Scobee)를 선장으로 5명의 승무원들이 탑승한 25번째의 탐사여행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특별히 선발된 고등학교 교사 맥우리프(Christa McAuliffe(두 아이의 어머니)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승하게 되어서 특별한 관심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리다의 나사 기지에서 발사된 지 73초 만에 4만 6천 피트 상공에서 온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불덩이로 변하여 낙하하고 말았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특별 조사위원회를 임명하여 원인을 규명하였는데 결론은 로케트 추진기에 있던 O-ring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원인은 잘 못 만들어진 나사와 나사 사이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고무 링이 고도의 찬 공기에 부딪치면서 부풀어져서 제 기능을 못한데 시고가 났다는 것입니다만 후에 NASA를 통해 나온 원인은 좀 달랐습니다. 몇 차례 결함을 발견하여 지연된 발사준비에 그날 밤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효과의 극대화를 노린 백악관의 발사 독촉으로 NASA가 무릎을 꿇고 발사를 강행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레이건의 통치

1980년 미국이 경제적으로, 대외적으로 완전히 무력해진 듯한 상황 가운데서 세금을 삭감하고, 정부의 적자를 감소하며 인플레이션을 잡고 미국의 국방을 새로이 보강하겠다는 온갖 좋은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출마한 레이건은 후에 그의 부통령 런닝메이트가 된 부시(George Bush) 한테서도 ‘마술 주머니 같은 경제정책’이란 비아냥을 받았지만 ‘새로운 보수주의’란 이름 아래 보수진영의 연합을 이끌어 내어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되었습니다. 그를 지지한 양대 보수세력 가운데 하나는 ‘moral Majority’라고 부르는 파웰(Jerry Falwell) 목사가 이끈 극우 보수 기독교 단체로 미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다시 하게하며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사회정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줄이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세력은 미국의 국방을 강화하고 세금을 낮추겠다는 레이건의 공약에 호응하는 보수적인 남부의 백인들과 대부분의 노동계층이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취임 초에 경제회복 조치들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공약 시행에 안간힘을 썼지만 실업자는 계속 늘어가고 인플레도 계속되며 파산하는 회사들은 급격히 늘어 갔습니다. 그의 경제정책도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했든 것입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랍국가들을 중심으로 OPEC 을 이용하여 고유가로 미국의 경제를 뒤흔들던 세계시장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세계적인 불경기로 산유국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심해지자 멕시코나 노르웨이, 영국 같은 OPEC에 소속되지 않은 산유국들이 서방경제의 목을 죄고 있는 유가를 낮추어 풀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OPEC 소속 국가들은 오일이 남아 돌아갔고 더 이상 무기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일 값이 내리고 미국경제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레이건의 기업규제 철폐나 반 트러스트 법의 철폐등 기업 친화적인 정책으로 경기는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세금감면의 덕으로 부자들은 전성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중산층에 돌아 오는 보상은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죤슨의 민주당 정부가 만들어 놓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위한 국내 예산은 미 국방력 강화 우선 정책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민주당 정부 아래서 막대한 예산을 복지기금으로 쏟아 부어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불평해 온 보수적인 공화당은 약화된 미국을 회복시키기 길은 국방력 강화에 있다며 막대한 예산을 국방비에 쏟아 부었습니다.

경제 회복에 관한 한 레이건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미국에 닥친 유례 없는 경제적인 쓰나미의 단초 제공이 레이건 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레이건의 대통령직 수행방식을 거론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우출신의 그는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호감을 유발하는 데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지만 정책수행에는 별 관심이 없어 구체적인 진행과정에 대한 점검이나 질문이 전혀 없이 부하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버려서 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을 부하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게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가 백악관을 떠난 후에도 계속 많은 행정관료들이 부패에 연류된것이 발각되어 처벌받았습니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은 ‘운좋은 대통령’(Teflon President)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란은 테헤란에 억류하였든 인질들을 아무 조건도 없이 레이건의 취임시간에 맞추어 석방하는가 하면 1981년 3월에는 암살시도를 모면하고 살아났습니다. 그의 친화적인 태도는 부하들의 잘못도 농담 한번으로 덮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테로리스트들이 베이루트에 있는 미 해병대 막사를 공격 239명의 해병이 죽었는데도 레이건은 이미지나 인기에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리비아의 카다피 공격에 실패하였음에도 건재하였고 그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습니다.

그를 곤란하게 한 것은 Iran-Contra 사건이었습니다. 진상은 아직까지도 확인이 안되었고 그의 임기 말년 행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언론에 크게 다루어졌지만 그의 인기는 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란이 미국의 인질을 석방한 후에도 중동에서는 여기 저기에서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인질들과의 협상을 불가한 것으로 천명한 레이건 대통령이 국방안보 보좌관인 맥파린(McFarlne)의 이야기를 듣고 인질 석방 대가로 무기를 이란에 공급하는 협상을 추진하도록 재가하였습니다. 맥파린은 납치된 CIA 에이젼트를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두 차례 무기를 전달하였으나 인질은 돌려 받지 못했습니다.

이때 미국애서는 니카라구아의 맑시스트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콘트라(Contra)라고 하는 반군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만 민주당 의회의 반대로 지원금 확보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의 무기를 원하는 이란에 무기를 팔아 그 돈을 가지고 ‘콘트라’를 지원하기로 계책을 꾸미고 그 책임을 이란과의 협상에 관계하고 있는 해병대 대령 출신 노스(Oliver North)가 맡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건을 ‘이란-콘트라’(Iran-Conra)사건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중동의 한 잡지에 맥파린과 노스가 함께 테헤란을 방문한 사진과 함께 폭로되자 미국에서도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1986년 11월 13일에 레이건은 ‘소량의 방어용 무기를 이란에 팔았다는 것’과 ‘무기와 인질을 교환한 일은 없다’는 것을 발표하고 상원의원 John Tower가 위원장인 대통령 조사위원회를 구성 1987년 초 보고서를 발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의회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레이건이 의회와 국민들에게 한 거짓과 불법이 폭로되었는데 그것은 워터게이트 같은 국민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하급 관리들에 의하여 위험한 외교정책이 수행되었으며 측근 보죄관들이 탄핵 가능성을 지적하였음에도 하급관리들을 동원 법을 무시하고 음모를 꾸며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1994년 1월 특별검사 Lawrence E. Walsh가 발표한 이란-콘트라 사건에 대한 최종보고서에서 이란-콘트라 작전은 “미국의 정책과 법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은폐하는데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가 개입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인가하였다든가 거래에서 나온 이익금을 전용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면책이 되거나 사면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레이건은 8년 동안의 재임기간중 바닥까지 내려갔던 미국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으며 세금을 낮추고 정치 지평을 바꾸어 놓으며 일반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었습니다만 사상 최고의 국가적 부채를 기록하여 후임자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선물하였고 외교정책에서도 특히 이란-콘트라와 같은 무모하고 단견적인 실수들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쏘련과의 관계에서 그가 이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계속 높은 점수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쏘련과의 냉전체제 아래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정책아래 방위비를 증강하였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쏘련을 압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쏘련의 지도자로 부상한 골바쵸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1987년 아이슬랜드에서 열린 골바쵸프와의 정상회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양 초강대국의 핵무기 감축을 결의 하는 등 해빙무드를 확산하여 유럽대륙에서의 냉전종식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결국 쏘비엣 공화국이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이건이 ‘악의 제국’이라고 밀어부쳤든 소비엣 공화국이 사라지면서 보수주의 기치 아래 옛 미국의 영광을 되 찮으려 안간힘을 다하던 노 대통령 역시 부통령이었든 죠오지 부시(아버지)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맙니다만 그것은 늙은 미국의 지도력이 20세기를 앞두고 새로운 세대에게로 옮겨가는 길을 당겨 주었습니다.

21세기를 앞두고 8년동안 미국을 이끌어 온 민주당의 클린튼 대통령과 21세기 들어서면서 8년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한 공화당의 죠오지 부시(아들)는 다같이 베이비 부머들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생들입니다. 물론 이들의 시대도 16년만에 막을 내리고 보다 젊은 세대에 의한 새로운 미국의 역사가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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