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3
2008/12/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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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제3절 1970년대 사회상과 닉슨의 집권 및 워터게이트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12월>

제8장, 제3절 1970년대의 사회상과 닉슨의 집권 및 워터게이트

60년대의 미국 민권운동

1950년대 중반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하는 비폭력 저항운동과 법정투쟁은 그런대로 효과를 거두면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의 정형으로 자리 잡는 듯 했습니다만 케네디가 암살당하는 등 폭력의 시대가 열리면서 특히 남부에서는 흑인 지도자들이 암살당하고 흑인교회가 폭파되며 행진하던 여학생들이 백인들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등 적지 않은 폭력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킹 목사의 SCLC 나 NAACP등은 평화적이고 법정을 통한 운동을 계속강조하였지만 그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단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미온적인 킹 목사의 행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과격한 말콤 X의 언동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1965년 8월, LA에서도 가장 빈민지구인 Watt에서 흑인 주민들과 백인 경찰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주민의 98%가 흑인으로 가난과 열악한 주거지역, 실업과 범죄 그리고 마약이 범람하여 흑인들의 절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경찰의 폭력 검문에 항의하며 시작된 충돌은 폭력과 약탈로 번저갔고 Watt지역은 폐허가 되어버렸는데 유럽의 한 특파원은 “2차 대전 말기의 독일과도 같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6일간 계속된 난동에서 34명이 죽고 1,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4,000여명이 체포되고 3천 5백 만 불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러한 수적 피해보다도 인권운동의 새로운 양상과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킹 목사가 주도하던 ‘순수한 영혼의 힘’으로 저항하던 시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흑인들의 힘’에 호소하는 저항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1966년 여름 전국의 몇몇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1967년에는 뉴왁과 데트로이트 등지에서 대규모 폭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조사, 연구한 정부기관의 보고서는 “미국은 분리되어 있으며 불평등한 두 개의 사회,-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 로 가고 있다. “고 결론 내렸습니다.

1968년 2월 29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백인 레이(Ray)에 의하여 멤피스 모텔에서 암살당했으며 레이는 1998년 죽기까지 단독범행이라며 배후를 밝히지 않았지만 케네디의 경우와 같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랄프 네이더의 소비자 보호운동

20세기 후반기에 이사람 만큼 미국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콘네티커트 주의 윈스테드에서 태어난 랄프 네이더(Ralph Nader) 변호사는 프린스톤과 하바드 법대 출신으로 연방정부 노동부에서 일한적도 있지만 소비자 보호의 십자군으로 발벗고 나서서 식품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들에게는 안전한 물건을 제동하고, 회사들에게는 양심적인 상행위를 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의 영향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현재 미국에 보편화되어 있는 금연풍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소비자 보호운동으로 흡연이 해롭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의회에서 논의가 되어 국민건강에 책임을 갖는 surgeon general의 “흡연은 폐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증언을 얻어냄으로 당시만해도 사회적인 관행으로 받아들였던 흡연이 오늘에 와서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마저 도 금지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네이더의 숨은 공로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권투 챔피언 모하메트 알리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과 같이 쏘겠다”다며 기염을 토해 체육인으로서는 최대의 화제를 날리며 팬들을 모았던 모하메드 알리 역시 1960년대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인물입니다. 켄터키 주 루이빌 태생의 본명 크레이(Cassius Marcellus Clay)는 1960년 여름 올림픽에서 권투 헤비웨이트 급에서 금 메달을 획득하고 1964년 헤비웨이트 세계 챔피온을 획득한 흑인 선수로 말콤 X의 영향을 받아 1967년 회교도로 전향하고 모하메트 알리(Muhammad Ali)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권투선수로서의 그의 빠른 스피드와 강한 펀치는 권투 팬들의 열광을 자아냈으나 시합전의 안하무인 격인 자만한 태도와 떠벌이 태도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리의 존재는 젊은 흑인들에게 자부심을 넣어 주었고 “Black is beautiful” 이라는 자신감을 부어주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징집을 거부함으로 한동안 링에 서지 못하였으나 1980년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뿌렸고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X와 함께 또 다른 형태의 흑인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만 은퇴 얼마 후에 파킨스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달f에 처음 착륙한 우주인 암스트롱

미국에 앞선 쏘련의 첫 우주선 스푸트닉호의 성공에 황당해하는 미국민들에게 10년 내에 달 착륙우주선을 개발하겠다고 약속한 케네디 대통령의 약속대로 미 우주항공국은 1969년 7월 20일 네일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부즈 아드린(Buzz Aldrin)이 탄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전 세계가 TV를 통해 주시하는 가운데 미국국기를 달 표면에 꽂았고 “여기 지구에서 온 사람들이 1969년 7월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뎠으며 우리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이곳에 왔다”는 팻말을 남기었습니다.

이로서 미국은 쏘련에 당했던 수모를 말끔히 씻어냈으며 암스트롱의 말대로 “한 인간에게는 조그마한 발걸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류에게는 큰 진전”을 가져다 주었으며 미국인들에게는 잃었던 자부심을 다시 찾는 통쾌한 쾌거였습니다.

닉슨의 집권과 워터게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런닝메이트로 8년 동안 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강력한 보수정치인으로 명성을 쌓아 온 닉슨은 케네디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하고 “다시는 나에게 발길질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캘리포니아로 낙향하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베트남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죤슨 대통령은 닉슨에게는 구세주로 다가왔습니다. 1963년 11월 케네디를 계승해 대통령으로 취임한 죤슨은 다음해(1964년) 11월의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보수주의 후보인 골드워터를 쉽게 눌렀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1968년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 예비선거에서부터 타 후보에 몰리면서 3월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역 강력한 후보가 사라진 자리에 닉슨은 재기를 꿈꾸며 공화당의 후보로 선출되었고 ‘월남전 종식’을 공약으로 그 해 11월 민주당의 험프리(Hubert Humphrey)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54만 여명의 미군이 월남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특사로 베트남전 종식을 위해 월맹과의 막후 협상을 벌이는 한편 월남전은 월남군인들에게 맡긴다며 과감한 미군 철수를 단계적으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협상도 전쟁도 생각대로 진전이 되지 않고 국내에서의 반전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71년 3월 FBI에서 도난 당한 서류의 사본들이 국회의원들과 언론기관에 우송되고 와싱톤 포스트지에 기재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COINTELPO라는 이름의 문서에는 FBI의 후버가 1956년부터 공산당을 비롯하여 국내의 여러 단체들을 내사하고 공작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반전단체들과 민권운동단체들에 대한 공작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편 같은 해 6월에는 뉴욕타임스에 Vietnam Archives라는 제목아래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정부가 월남전에 관하여 얼마나 국민들을 속이며 무능하게 대처하였는지를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국방성에서 작성한 비밀문서에 근거한 것으로 비록 닉슨의 취임 이전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한창 고조된 반전무드에 기름을 뿌린 격이었습니다. 닉슨 행정부는 앞으로 계속될지 모르는 기밀문서 유출을 예방하기 위하여 뉴욕타임스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법정에 계재중지 신청까지 하였으나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이유로 언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닉슨 행정부안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든 닉슨을 보호하고 재선시켜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습니다.

1972년 11월 대통령선거가 5개월도 채 남지 않은 6월 17일 와싱톤 디씨의 워터게이트 삘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 사무실에 5명의 괴한들이 침입했다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대통령재선위원회의 직원신분증을 소지하고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하고 기밀 선거전략 문서들을 훔치기 위하여 침입한자들로 그 가운데에는 전 FBI요원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9월 15일 정식 기소되었지만 그들의 신분증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사 침입사건은 재선위원회나 백악관과는 무관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반수 이상이 워터게이트 침입사건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11월 7일에 시행된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은 민주당의 맥거번(George McGovern)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닉슨 재선위원회의 부정과 재정적인 부패 그리고 정치적인 음모등에 대한 소문들이 계속 퍼지면서 1973년 2월 7일, 상원은 대통령 선거캠페인 활동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민주당사 침입사건으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전 CIA 직원인 맥코드(James W. McCord)가 이 사건에 대하여 함구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으며 사건의 총 책임자는 대통령재선위원회의 의장이었든 전 검찰총장 밑첼(John Mitchell)이라고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5일 닉슨의 보좌관이었든 딘(John Dean)이 상원조사위원회 증언에서 워터러게이트 사건을 무마하는 일에 닉슨이 직접 개입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딘의 증언이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가운데 7월 16일 닉슨대통령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의 대화들을 비밀리에 녹음하고 있다는 백악관 보좌관 버터휠드(Alexander Butterfield)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 증언은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수사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녹음테이프를 조사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대통령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수반의 특권으로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출할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헌법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10일 애그뉴(Spiro Agnew) 부통령이 매릴랜드 주지사 시절의 세금포탈사건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당시 하원공화당 총무인 포드(Gerald Ford)를 닉슨이 부통령으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20일 법무부가 임명한 특별검사가 백악관에 비 협조적이라 하여 닉슨대통령은 연방 검찰총장 리차드슨(Elliot Richardson)에게 특별검사 칵스(Archibald Cox)를 파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검찰차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들의 사표를 수리한 닉슨은 검찰청의 제3인자를 통해 칵스를 파면합니다.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The 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부르는데 닉슨 탄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큰 반발을 가져 왔고 하원에서 대통령의 탄핵조치를 실행에옮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10월 23일에는 탄핵심사를 위한 하원법사위원회가 구성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자 닉슨 대통령은 마지못해 대통령 집무실의 녹음테이프를 조사위원회에 넘겼으나 테이프 2개가 빠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해를 넘기고 1974년에 들어와서도 의회와 닉슨간에는 수사에 필요한 백악관의 테이프 제출을 놓고 계속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닉슨 재선 위원회와 관련되어 기소된 사람들이 계속 유죄판결을 받으므로 닉슨 백악관의 신뢰도는 추락을 계속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4월에는 닉슨의 탈세협의가 입증되었으며 그 해 7월 24일에는 대법원이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여 닉슨은 특별검사가 요구하는 녹음테이프들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대법원의 명령에 응하겠다는 백악관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7월 27일 하원 법사위원회는 탄핵 안을 통과시킵니다.

닉슨은 8월 5일 “민주당사 침입사건 6일 후 닉슨이 이 사건에 대한 FBI 수사를 중단하도록 명령한 테이프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공개 시인하고 사흘 뒤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고 8월 9일 캘리포니아로 떠났으며 부통령 포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8월 21일 뉴욕 주지사인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9월 8일에는 “닉슨이 대통령으로 재임 시 행하였거나 행하였을 수 있는 미국헌법에 대한 모든 범법행위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허용한다”는 특별사면에 서명함으로 닉슨을 둘러싸고 2년여 동안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든 워터게이트 사건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 정치가의 과도한 야욕과 집착,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집념 그리고 거짓말로 점철되었든 오욕의 역사가 의회와 언론의 끈질긴 추적 끝에 온 천하에 밝혀졌을 때 많은 미국사람들이 당혹하고 자괴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힘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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