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2
2008/11/24(월)
추천: 5068
제8장 제2절 케네디의 죽음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미국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11월 15일>

8장 새로운 미국-(1960년대와 70년대)

 

제1절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진통

제2절                케네디의 죽음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미국

제3절                1960년대의 사회상과 닉슨의 집권과 워터게이트

제4절                1970년대 흔들리는 미국

제2절 케네디의 죽음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미국

케네디의 죽음 

“미 국민들이여, 국가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며 온 국민들의 기대 속에 1961년 3월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인 외교실패를 거듭하면서 인기가 떨어져 갔습니다. 1964년 재선을 염두에 두고 1963년 11월 부통령 존슨의 출신 주면서도 특히 반 케네디 정서가 심한 남부의 텍사스 지역 방문길에 올랐던 케네디는 22일 달라스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든 중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쏜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급송되었으나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와싱톤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피 묻은 옷 그대로 충격에 휩싸인 잭크린 케네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통령이었든 존슨(Lyndon B. Johnson(1908-73)이 대통령 선서를 하고 3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총격사건이 발생한지 몇 시간 만에 용의자 오스왈드가 달라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2일 후 경찰의 경호아래 다른 유치소로 이송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술집(bar)을 경영한다는 루비(Jack Ruby)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스왈드의 이송과정이 TV로 생 중개 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고 케네디 암살용의자가 살해됨으로 암살의 진상과 배후가 밝혀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당시 국민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음모설과 유언비어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하여 정부는 당시 대법원장이었든 워렌을 위원장으로 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 철저한 조사를 거쳐 1964년 9월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오스왈드는 달라스 교과서 창고의 6층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았으며 단독범이었고 오스왈드를 죽인 루비도 단독범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음모설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것으로 FBI는 보다 철저한 경호조치를 취하여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대부분들은 그 결론에 좀처럼 수긍하지 않았고 계속 음모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1970년대 후반에 미 하원 특별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케네디 암살사건을 다시 조사하였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케네디가 어쩌면 음모에 의해 암살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조사과정에서 1970년대에 FBI에 의한 큐바의 카스트로를 위시하여 외국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음모들이 밝혀졌고 CIA가 갱스터들을 매수하여 카스트로 암살음모들을 꾸민 것 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결과 케네디 사후 2,30년이 지나도록 정부나 의회 조사기관들이 증거물들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과 함께 논란이 계속되면서 케네디의 죽음에 관한 책만도 2,000여종 이상이 출판되었습니다.

존슨의 취임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유고로 잔임 기간을 승계한 존슨에게는 1년 앞으로 다가 온 선거를 준비하여야만 했습니다. 공화당 보수주의자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 맞서 빈곤과 인종적인 불공정을 종식시키고 ‘위대한 사회’의 구현할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경제적, 교육적 개혁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 버릴 것을 다짐한 존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선 후 그는 과감한 입법활동을 통해 자신의 ‘위대한 사회’의 이상을 실현해 나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때 제안되었든 ‘민권법’을 통과시키고 직업 알선기구들을 만들고 메디케이드, 메디케어 제도가 처음 시행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 딜정책 이후 가장 야심적인 사회 개혁 정책을 시행하여 국내에서는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만 베트남 문제에 점점 끌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1954년 프랑스가 인도지나 반도에서 철수한 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는데 당시 공산주의 세력과의 치열한 냉전관계에 있던 미국은 반 공산주의의 사이공 정부를 처음부터 지원하였습니다. 돈과 물자를 보내는 한편 고문단들을 보내어 베트남 특공대들을 훈련시켰는데 1963년 이미 1만 5천 여명의 군사고문단이 사이공 정부를 돕고 있었습니다. 북 베트남 해안에 어뢰정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전함을 걸프 해협의 통킨(Tongkin)만에 파견하였는데 죤슨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던 1964년 여름 월맹이 이 전함에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존슨은 미국 ‘전함’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북 베트남에 대한 공중폭격을 명령합니다. 이 공격 중에 항공기 하나가 격추되고 조종사가 첫 전쟁포로로 억류됩니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통킨만 결의안”(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을 의회로부터 얻어냅니다. 이 결의안에 의하면 대통령은 미군에 대한 공격을 격퇴하거나 예방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를 행사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며 그에 덧붙여 베트남에서의 필요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의회만이 가지고 있는 전쟁선포의 헌법상의 권리를 존슨에게 넘겨준 것이며 이로 인해 ‘공산주의 앞에는 비겁하다”는 공화당의 비난을 일시에 불식시키고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 속으로 돌이킬 수 없이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전쟁 일지 

19세기 유럽의 국가들이 다투어 식민지를 확장하든 1862년 프랑스가 베트남제국을 점령 통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인도지나에서 프랑스와 일본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1890년 중부 베트남에서 출생한 호지민(Ho Chi Mihn)은 1918년 서양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위 원칙에 입각한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프랑스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가 모스코바로 가 공산러시아를 배우고 1941년 베트남으로 돌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지민이 전국적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공산당을 해산하고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연립정부를 구성하자 1946년 프랑스는 프랑스 연방 안에서의 독립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인정하였습니다만 얼마 가지 않아 프랑스와 베트남간에 프랑스-인도지나 전쟁이 발생합니다.

2차 대전 이후 러시아와 냉전을 벌리면서 공산주의의 세계적인 확산에 신경을 높이 세우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 중이던 1950년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하게 됩니다.

트루만에 이어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1954년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조치라며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공개적으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1954년 5월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과 남 베트남 공화국(월남)으로 일단 분리하고 통일문제는 후에 국민들의 투표로 결정한다는 결의를 하고 프랑스는 인도지나에서 철수 합니다. 그 해에 미국은 반 공산주의 사이공(월남) 정부에 1억불 이상의 군사지원을 보냈습니다.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피하고 군비와 전쟁물자 그리고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고문단을 계속 지원하였는데 1959년 7월 군사고문단으로 그곳에 파견되었든 미군 2명이 베트공에 의해 살해되면서 미군의 희생이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 남 베트남 해방전선이 형성되고 베트콩으로 불리는 해방전선 군인들이 게릴라 전을 전개하면서 전쟁은 격화되어 갔습니다. 1961년 새로이 선출된 케네디 대통령은 조사단의 전투병력 파견건의에도 불구하고 첫해에는 보다 많은 군 장비와 고문단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1962년에 들어서면서 사이공에 미 군수지원 베트남 사령부를 설치하고 5월에는 5,000명의 해병대와 50대의 전투기를 파견, 군사고문단도 1만 2천명으로 증강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3주 전에는 월남의 고딘 디엠 정부에 쿠테타가 일어나 디엠과 그의 동생이 살해되었는데 디엠 정부의 부패와 민심이반 때문에 CIA의 지원하에 일어난 것으로 후에 알려졌습니다. 다음해인 1964년 8월에 앞서 언급한 통킨만(Gulf of Tonkin) 사건이 발생하였고 사건의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슨 대통령은 월맹 본토에 대한 폭격을 명령하였고 의회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하는 ‘통킨만 결의안(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을 통과시켰습니다. 그해 11월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존슨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며 연말까지 베트남 주재 미 군사고문단은 23,300명으로 증가되었습니다.

1965년 3월 2개 대대의 미 해병대가 첫 번째 전투부대로 베트남에 투입 되였으며 4월에는 존슨 대통령이 하노이에 정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하노이 정부에 의하여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투는 점점 격렬하여 졌고 1965년 말에는 미국의 전투병력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해 4월 15일 워싱톤에서는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Student for Democratic Society)이 주관하는 대 규모의 반전 집회가 열렸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월맹을 종전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하여 폭격을 일단 중지하였으나 북이 끝내 호응하지 안차 1966년 1월 31일부터 다시 북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9월에는 베트콩들의 준동을 막기 위하여 화학약품 고엽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에는 존슨 대통령이 월남전에 개입되어 있는 6개국(오스트랠리아, 필립핀, 타이랜드, 뉴질랜드, 한국, 남 베트남) 정상회담을 소집, 월남전 종식 평화안을 채택하였는데 1966년 말에는 미국 전투병력이 4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1961년부터 1966년 말까지 미군 사망자가 6,664명, 부상자가 37,738명에 이르렀으며 ‘의회 재정위원회’는 1967년 7월 전쟁으로 인해 미국경제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하였습니다. 10월 부터는 와싱톤을 위시하여 뉴욕등 대도시에서 대규모 반전 집회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월남전 참전반대 무드가 전 미국을 휩쓰는 가운데 연말에는 미군이 50만 명으로 증강되었습니다.

1968년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미국이 소용돌이 친 한 해였습니다. 베트콩과 월맹 군이 연초부터 케산 전투와 음력정월 대공세로 미군을 곤경에 떨어트렸는가 하면 2월 29일에는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이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며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유진 맥카디(Eugene McCarthy) 에게 패한 존슨은 3월 31일 대통령 후보불출마를 선언하고 4월 4일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가 하면 6월 6일에는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가 암살당합니다. 그해 11월 6일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닉슨이 민주당의 험프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969년 닉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키신저 안보보좌관의 주도하에 새로운 베트남 전쟁 수습책이 마련되었습니다. 파리 평화회담을 월남과 베트콩을 포함한 4자 회담으로 확대하는 한편 미군과 월맹군이 월남에서 동시에 철수할 것을 제안하면서 월남전은 월남군대에 의하여 수행한다는 월남전쟁의 베트남화 조치의 1단계로 2만 5천명의 미군 철수 안을 발표합니다.

그 해 9월에 1950년대부터 북 베트남을 이끌어 온 호지민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미국 의회는 전쟁종식을 위한 압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대학 캠퍼스와 대도시에서의 반전 평화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부인 로레타 킹이 이끄는 평화시위가 와싱톤에서 25만 여명의 관중을 동원하였습니다.

1970년 키신저가 파리에게 북 베트남 대표와 비밀협상을 하는 가운데 닉슨은 연내 15만 미군의 철수를 발표하지만 대학 캠퍼스에서의 반전시위는 더욱 격화되어 가던 중 5월 4일 오하이오주의 켄트(Kent)대학에서 주 방위대의 과잉진압으로 4명의 학생이 총에 맞아 사명하였으며 10일 후에는 미시시피주의 잭슨주립대학(Jackson State University)에서 두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월남군이 수행하도록 하는 전략을 계속하는 가운데 미군들은 계속 철수하여 1971년 말에는 15만 6천 여명의 미군만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으나 월남군들을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북쪽의 월맹군들은 남 베트남 깊숙이 침투하였습니다.

1972년 1월 닉슨대통령은 미국이 월맹과 비밀 협상중임을 공개하면서 8개평화안을 제안하고 2월에는 중국방문길에 나섭니다. 그러나 월맹은 평화안에 대한 수락 대신 그 해 봄부터 대대적인 전투공세를 벌리자 미국은 협상 중 중지하였던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합니다. 그 해 10월 미국에서의 대통령선거를 2주 앞두고 키신저는 파리평화협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닉슨은 민주당의 맥고번(McGovern)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키신저와 레 둑 토의 협상은 다시 결렬되고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가운데서 미군은 월남에서의 철수를 계속하여 1973년 3월 29일 마지막 미군부대가 월남을 떠나버리자 하노이에서는 모든 미군 포로들을 석방하였습니다. 그 해 10월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 둑 도가 월남전의 평화적 해결의 길을 열었다고 하여 노별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만 레둑토는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노벨상을 거절하였습니다.

1974년에 들어서자 월남의 대통령은 전쟁이 재개되었다고 발표하였고 전쟁이 계속되어 오다가 1975년 월맹과 베트콩의 월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6개월여의 대공세 끝에 4월 1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23일에는 포드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하고 월남의 고위 공직자들과 민간인들을 철수시키는 가운데 4월 29일 공산주의 군대가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 20여 년 동안 미국이 개입하였든 월남전은 월맹과 베트콩의 공산주의 군대에 의한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200여 년 미국 역사상 처음 겪은 불명예스러운 패배였지만 미국은 1982년 11월 와싱톤에 베트남 참전기념비를 제막하고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월남에서 전사한 5만 8천명의 미군 이름들을 조각하여 그들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44   제8장 제4절 중동정책과 OPEC에 흔들리는 미국  4524 12/26(금)
43   제8장, 제3절 1970년대 사회상과 닉슨의 집권 및...  5123 12/26(금)
42   제8장 제2절 케네디의 죽음과 월남전에 빠져드는...  5068 11/24(월)
41   제8장 새로운 미국(1960년대와 70년대) 제1절 새...  9869 11/24(월)
40   제7장 1950년대의 미국(요약)  11284 10/21(화)
39   제7장 제3절 1950년대의 미국민권운동  4858 10/21(화)
38   제7장 제2절 한국전쟁과 미국  5032 08/24(일)
37   제7장 50년대의 미국-공산당 색출작업과 냉전에...  5445 08/24(일)
36   제6장 번영과 좌절과 대국에로의 안착(요약)  3832 07/24(목)
35   제6장(제5절)-제2차 대전의 전개과정과 전쟁의 ...  4930 06/27(금)

 
처음 이전 다음       목록 홈 알림 쓰기

ⓒ Copyright 1999~   TECHNOTE-TOP / TECHNOTE.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