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1
2008/11/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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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새로운 미국(1960년대와 70년대) 제1절 새로운 세대의 출현  

<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11월 1일>

제8장 새로운 미국-시대는 바뀌었다.(60년대와 70년대)

들어가는 말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 동조세력의 척결과 민권운동의 확산으로 소용돌이 치던 50년대였지만 한국전쟁 이후 아이젠하워 공화당 정권의 방위산업 육성책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면서 60년대에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세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 미국식약청에 의해 피임약 Enovid 판매가 허용되면서 록 뮤직과 함께 성 자유, 성 개방의 물결이 젊은이들 사이에 몰려들어 사랑과 평화를 구가하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넘쳐났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퇴행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정부, 교회, 사회 등 기성질서와 권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그런 분위기는 문학작품을 통해, 록 음악을 통하여 반 문화(counter culture) 현상으로 사회전반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젊은 케네디가 혜성같이 나타나 대통령이 되었으나 미국민들에게 제시하였든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외교적 실책만을 거듭하다가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었고 그의 후임으로 등장한 죤슨 대통령은 국내적으로 <위대한 사회>를 웨치면서 민권법을 제정하고 사회보장법을 시행하는 등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으나 미국을 월남전의 수렁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 후 닉슨의 출현은 국내외적으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돌파구를 찾는 듯 하였으나 베트남에서의 무조건 철수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권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은 채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당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 대통령과 민주당 카터 대통령시대 역시 외국들로부터 수모를 당하면서 미국의 권위는 추락해 갔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미국인들이나 미국기관들에 대한 테러가 잇따랐고 이란에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던 독재자 샤(shah)가 축출되었으며 테헤란에서는 미국대사관에 있는 직원들이 인질로 잡혀 카터의 대통령임기 내내 발목을 붓잡았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1980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레이건대통령이 국민들의 기대 가운데 카터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영화배우로서의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좋았던 옛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우리도 다시 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띄워주고 러시아를 밀어 부치며 경제를 안정시켜 대외적인 미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등 재임 8년 동안 표면적으로는 인기 좋은 대통령이었고 국민들을 만족하게 하였지만 경제나 외교 정책 등을 집행함에 있어서 너무나 아랫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제대로 챙기지 않아 허점을 들어내고 실패한 것들이 적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의 경제적 위기 상황이 레거노믹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제1절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진통 

8년 동안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를 끝나가는 1960년 당시 부통령이었든 닉슨(Richard Nixon 1913-94)과 민주당의 케네디(John F. Kennedy 1917-63)상원의원 사이에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미 현대사에서 2000년도 고어와 부시의 접전 말고는 가장 치열하였든 선거전에서 공화당 행정부가 미국을 퇴보시켰다며 전진을 약속한 케네디가 당선된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현 정부의 부통령이었든 닉슨은 야당후보에 비해 수세적인 입장에서 몰릴 수 밖에 없었든 게 사실이지만 케네디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케네디에게는 재계와 정계에는 물론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아버지 Joseph Kennedy Sr.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텍사스 출신 죤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함으로 남부의 표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든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TV에 생중계된 후보간의 토론회가 결국은 당선자를 결정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당시 병으로 2주간이나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토론에 임했던 닉슨의 파리하면서도 음흉스러운 얼굴은 생기 넘치고 미남형이었든 케네디와 대조를 이루면서 케네디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라디오로 토론을 들은 사람들은 토론회가 승자를 가리기 힘든 막상막하였다고 대답한 반면 TV 시청자들은 케네디에게 절대적인 우위판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결정적인 요인은 흑인 유권자들의 표를 긁어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의 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격열해진 민권운동과 함께 흑인들의 표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선거기간중 닉슨의 부통령 후보였던 Henry Cabot Lodge가 흑인표를 의식 닉슨행정부에 흑인을 기용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반발을 의식한 닉슨이 그것을 부인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민권운동중 킹 목사가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케네디 의원의 주선으로 석방되는 일이 있어 흑인들의 표가 케네디에게로 쏠리며 대세를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선거 결과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 탄생하였고 인기 좋은 아내 짹크린과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동생 로버크 케네디(Robert F. Knnnedy 1925-68) 등의 등장으로 미국에서는 마치 새로운 왕가가 탄생한듯한 들뜬 분위기가 사람들을 흥분시켰습니다.

“미 국민들이여, 국가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며 1961년 3월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은 나라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가르쳐 주며 미국의 이상과 기술들을 습득케 한다는 야심 찬 평화 봉사단 활동을 시행하였는데 특히 남 아메리카의 발전을 목적으로 한 활기에 찬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의욕과 반 공산주의 강박관념으로 미국외교사상 가장 위험한 외교적인 실수들을 거듭 하기도 하였습니다.

피그만 사건

첫 번째가 카스트로의 큐바 침공계획이었든 The Bay of Pigs사건입니다. 이것은 케네디 취임 이전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이미 CIA의 책임자인 알렌 덜레스(Allen Dulles,1893-1961)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었는데 카스트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마피아의 하수인들을 이용하여 카스트로를 암살하고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큐바에 침공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세기 말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 이후 큐바의 경제는 사실상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미국이 관타나모에 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가 하면 하바나의 호텔이나 카지노등은 마피아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8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게릴라들을 지휘하여 독재자 Fulgenecio Batista를 쫓아내고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처음에는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며 와싱톤을 친선방문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만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큐바의 공산주의는 선거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닉슨의 지원하에 CIA는 큐바침공계획을 세웠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한 상황으로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부임하자 대통령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에 이란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샤(Shah)를 왕위에 앉게하고, 1954년에는 과테말라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친미정부를 수립한 전력이 있는 CIA 는 카스트로를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의 성공을 확신하였습니다. 케네디의 재가를 받은 CIA는 1961년 4월 망명 큐바인들로 구성된 침략군들을 피그만(the Bay of Pigs)에 상륙시켰으나 지원하기로 되어 있던 미 해,공군과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은데다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큐바군에 의해 실패하고 맙니다.

미국은 끝까지 이 작전에 그들이 개입하거나 지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만 미국의 위신은 여지 없이 추락되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려는 케네디의 야심 찬 계획들도 물거품이 되었을뿐 아니라 이 사건으로 미국과 큐바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으며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큐바 미사일 위기

쏘련의 후류스쵸프(Nikita Khrushchev, 1894-1971)수상은 피그만 사건이 일어나자 큐바의 군사력 강화를 빌미로 쏘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큐바에 군사지원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962년 10월 소위 말하는 큐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사건은 미국의 정찰기가 큐바에 쏘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정황을 포착함으로 미, 쏘간에 전쟁 1보전까지 갔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그만 사건으로 스타일을 꾸긴 케네디 대통령은 위신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미사일 기지를 해체하고 큐바에서 철수시킬것을 요구하면서 큐바해역을 완전 봉쇄하고 검색하라고 명령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큐바에 대한 전반적인 침공을 준비하였습니다. 무기를 실은 쏘련의 배들이 큐바로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류스초프 수상은 결코 미국의 검색을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쏘련의 배들이 큐바로 항해하는 13일 동안 양국간에는 긴장이 감돌았으며 전세계가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막후 협상을 통해 결국 쏘련은 미사일을 해체하고 미국은 큐바 침공을 백지화하기로 하고 10월 28일 쏘련이 무기를 실은 배들이 되돌아가겠다고 발표함으로 양 대국의 충돌은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의 위신이 좀 살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대결도 불사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여 결국 죤슨 대통령 때에 와서 미국을 베트남에서의 군사적 대결로 끌여들이게 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권운동

20세기 초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금주운동을 전개하고 뒤이어 여성 참정권 허용을 위한 캠페인을 벌린 결과 1920년 수정헌법 19조의 통과와 인준으로 여성 참정권이 확정된 후로는 이렇다 할 여성인권운동이나 여성들의 지위가 변화되는 일 없이 미국여성들은 대부분이 가사를 돌보고 자녀들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함께 직장을 찾는 여성들이 증가하였고 그것은 남녀 평등 내지 여권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큰 요인으로 스토우 부인의 <언클 톰스 캐빈>이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 처럼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The Feminine Mystique>를 들고 있습니다. 수 백만 부가 팔린 이 책을 통해서 여성들이, 특히 중산층의 백인 여성들이 아내와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나, 간호사, 비서 같은 여성들의 전문직종이나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는 하류층의 직장인들이 없었든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윗사람들은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든 것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남자들이 전장으로 끌려 나가자 많은 여성들이 노동현장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직장으로 돌아오자 여성들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가사와 자녀 키우는 일에 만족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잠재적 욕구에 일단 불이 당겨지자 당시 거세게 불던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연계되면서 미국사회에 여권운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여 작고한 프랭클린 대통령 부인인 엘레놀 루즈벨트(Eleanor Roosebelt)를 의장으로 ‘여성지위 연구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조직하였고 1964년에는 여성도 연방으로부터 차별대우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1964년 흑인들을 위한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될 때 “인종, 색갈, 종교, 국가” 에 ‘성’을 추가함으로 여권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1966년에 NOW(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가 프리단(Friedan)을 의장으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창설되어 여권운동을 조직적으로 주관하게 되었고 젊은 세대들은 인권운동과 반전운동들과 연계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과격한 여권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지난 30여 년 동안에 미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분야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feminism이 미국사회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여성 대통령이 나오지 못했을 뿐 그 외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이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행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도 여성과 남성을 같이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성들에게는 사제직을 허용하지 않는 종교기관들이 뻐젓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민권운동

50년대 후반에 활발하게 불 붓기 시작한 민권운동은 마틴 루터 킹의 “나는 꿈을가지고 있습니다”로 유명한 1963년 8월 워싱톤의 링컨광장에서 열린 100만명 집회와 1964년 6월 죤슨 대통령이 서명한 ‘민권법’, 그리고 킹 목사의 1964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흑인민권운동가들 가운데는 Malcolm X(1925-65) 같은 인물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에서 출생한 그는 4살 때 백인들의 방화로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으며 흑인 분리주의자인 Marcus Garvey를 따르던 아버지가 그가 6살 때 차여 치여 죽자 백인들이 죽였다고 생각하였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수용되자 계속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이러한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란 그는 1946년에는 절도죄로 형무소에 들어가게되었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 Black Muslim으로 불리는 Nation of Islam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Nation of Islam의 대변인이 되었고 가장 유능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성장배경은 백인들에게 적대적이요 과격한 방법의 인권운동을 인도하게끔 하였지만 1964년 멕카를 순례하는 동안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Nation of Islam과의 관계를 끊고 새로운 인종적 화합의 비젼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Organization for Afro-American Unity를 조직하고 인종간의 화해를 주장하는 멧세지를 전하였으나 1965년 2월 21일 총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Nation of Islam의 멤버 3명이 용의자로 기소되었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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