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9
2008/10/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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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제3절 1950년대의 미국민권운동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10월>

제3절 1950년대의 흑인 민권운동

6.25 한국전쟁 때 한국에 투입된 24 보병사단 군인들이 1950년 7월 20일 처음으로 북한 인민군을 상대로 벌인 예천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들이 흑인들로만 구성된 흑인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 일병이 한국전 참전 영웅 최고의 훈장을 받았는데 군사적으로는 조그마한 사건이지만 미국흑인민권운동사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습니다.

2차 대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지능이 떨어진다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에 군에서는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고 지원업무에 배치하여 허드레 일만(식당에서 감자 깎는 것 같은)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흑인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패퇴를 거듭하면서 처음으로 흑인들만의 전투부대를 구성하여 전투에 투입한 것이 한국전쟁에서였고 그들은 전투에 승리함으로 일거에 흑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든 것입니다.

그 후 계속해서 미국본토에서도 흑인들에 대한 인식이 편견임을 입증하는 사건들이 나타났습니다. 1950년 가을에는 흑인 여류시인 그웬드린 부룩스(Gwendolyn Brooks)가 그녀의 시집 애니 알렌(Annie Allen)으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 미국의 흑인 외교관 랄프 번취(Ralph J. Bunche,1904-71)가 팔레스틴 분쟁을 조정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가뭄에 콩 나기였고 당시 Negro로 불렸던 1,500만명의 흑인들 대부분은 1896년 Plessy v. Ferguson 케이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의 함정에 걸려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 공립학교였습니다. ‘분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백인 학교는 도심에 위치하여 충분한 지원을 받아가며 좋은 시설과 교사들을 확보하여 교육하는 반면 흑인학교는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외진 곳에 열악한 환경 가운데 방치하여서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차별현상이 극심하였던 남부의 흑인들이 특히 교사들과 목사들과 학부형들이 힘을 모아 Plessy 법안을 바꾸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Brown 사건

NAACP의 법률지원담당 변호사 덜굳 마샬(Thurgood Marshall,1908-93)의 지원아래 캔사스, 남 캐로라이나, 버지니아, 데라웨어의 조그마한 도시 학부형들이 ‘분리하지만 평등하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백인사회의 각종 박해와 압력 나아가서는 위협과 폭력이 심각하였지만 1951년 린다 브라운(Linda Brown)이라는 공립학교 다니는 딸을 가진 올리버 브라운(Oliver Brown) 목사를 위시하여 여러 지역에서 흑인자녀들을 백인학교에 입학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들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소송 건이 1953년 드디어 대법원에까지 올라갔고 알파벹 순서에 따라 브라운 목사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왔으므로 그 후로는 ‘브라운과 교육위원회 소송 건 ’(Brown v. Board of Education)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미국민권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브라운과 교육위원회 소송 건' 심사를 앞두고 미 연방 대법원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대법원장이였든 프레드 빈슨(Fred M.Vinson)이 1953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자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얼 워렌(Earl Warren,1891-1974)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그는 법률가라기 보다는 충실한 공화당원으로 캘리포니아 지사를 지냈고 1948년 듀이(Dewey) 와 함께 공화당 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온건한 정치가로 인종문제에 관한 한 어떤 특별한 의견이나 정책을 집행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미국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대법원을 이끄는 16년 동안 인종적인 평등과 범죄정의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는데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워렌은 상원의 인준을 받기 전에도 Pressy 법안은 “다른 인종이 열등하다”는 전제아래’분리’를 인정한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지만 정치가로서의 감각을 가진 그는 판결의 중요성과 가져올 파장을 고려하여 투표를 통한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일치의 판결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꾸준한 설득 끝에 9명 대법관 전원의 동의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물론 대법원의 브라운 사건 판결로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일시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반발은 심각하였고 주 단위의 반발도 심하여 끝없는 상소와 지연작전을 사용하는 한편, 주 군대를 동원하거나 폭력을 사용하며 ‘분리정책’을 계속 시행하면서 인종증오심을 조장하기도 하였습니다.

Rosa Park 사건

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에 의하여 민권운동의 방향은 잡혔으나 마땅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여 주춤하고 있던 1955년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민권운동의 불을 집혀주는 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몽고메리의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는로자 파크( Rosa Park)라는 흑인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뻐스에 올라탔습니다. 늘 하던대로 흑인들의 지정석인 뒷 편으로 갔지만 자리가 없자 그녀는 중간지점의 빈 자리에 앉았습니다만 백인들이 더 올라오자 운전사는 그녀에게 뒤로 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자리를 백인에게 내주고 서서 가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운전수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그때문에 그녀는 몽고메리 교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흑인들의 지도자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로자 파크가 나가는 Dexter Avenue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갖 부임한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68)목사였습니다. 그는 평화적인 저항운동을 주장하면서 비 폭력적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드 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에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존경 받는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아트란타의 저명한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은 3대째 목사로 여러 대학과 신학교를 거치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1955년 보스톤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자마자 덱스터교회로 부임하여 온것입니다. 19세기 뉴 잉그랜드의 서정주의 시인 도로우(Henry David Thoreau)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도덕적 가르침-사랑, 용서, 겸손, 신앙, 희망, 공동체-에 기반을 둔 민권운동을 이끌어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1년 이상 계속된 보이코트 기간 로사 파크 여인이나 킹 목사는 물론 많은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위협과 부당한 처우들을 받았지만 1956년 11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모든 생활분야에 시행하려는 법원의 명령에 의하여 흑인들은 1년 만에 흑백좌석의 구분이 사라진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평화로운 보이코트 운동과 성과가 계기가 되어 남부에서는 1960년 중반 도시에서 폭력적인 인종차별반대운동이 일어나기 까지 10여년간 민권운동의 전형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57년 아트란타로 옮겨 온 킹 목사는 SCLC(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를 조직하고 5만여명의 흑인들을 동원하여 워싱톤까지 기도 대행진을 하였으며 몇 년 후에는 워싱톤 링컨광장에서 1백만 대행진을 주도하면서 유명한 “나는 꿈으 가지고 있습니다’는 연설로 민권운동의 열기를 한껏 고취시켰습니다.

스푸트닉(Sputnik) 사건

대법원의 브라운 판결사건과 민권운동으로 미국사회가 크게 동요하고 있던 1957년 10월 4일 미국사람들을 좌절과 혼돈과 불안 속으로 밀어 넣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쏘련이 Sputnik I 이라는 인공위성을 처음으로 쏘아 올린 날입니다. 농구공보다 조금 더 큰 인공위성을 지구 위 560 마일로 쏘아 올려 지구를 돌게 하는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2차 대전 후 치열한 냉전상태에 있는 쏘련이 당시 미국으로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던 일을 해 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만 쏘련이 계속하여 이번에는 동물까지 탑승시킨 훨씬 큰 인공위성 Sputnik II까지 성공하자 그것은 쏘련이 미국에까지 도달할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였다는 증거라 하여 핵무기의 우월성을 확보하였다고 안심하던 미국사람들을 공포와 공황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교육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 과학기술의 기본이 된 수학과 과학교육의 강화로 쏘련과의 기술경쟁을 처음부터 시작하게 하였으며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냉전에서의 우위를 위하여 ‘군수산업’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변을 겪으며 숨차게 달려가던 미국사회 한편에서는 편안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엘비스나 재즈 같은 무드음악 속에서 도색잡지나 섹스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니 이때 휴 헤프너(Hugh Hepner)가 창간하여 10만부를 매진한 Playboy 잡지가 나왔고 바비(Barbie) 인형이 소개되어 소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으며 음악팬들은 엘비스 프레스리에 열광하였습니다.

트루만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통치하의 전후 5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가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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