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8
2008/8/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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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제2절 한국전쟁과 미국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9월>

제7장 공산당 색출작전과 냉전에 휩싸인 미국 -50년대의 미국

제1절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냉전의 시작(지난번)

제2절 한국전쟁과 미국

밖으로는 스탈린의 무모한 공산주의 확장공세에 위협을 느끼며 안으로는 사회 각분야에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 색출로 불안에 쌓여 있던 미국사회에 1950년도 6월에 한국의 38선에서 터진 남한과 북한간의 전쟁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북아시아에 있는 한 신생국가의 국내전이 아니라 쏘련의 지원으로 잘 무장한 강력한 북한군이 공산주의 확장의 일환으로 남한을 침공한 것으로 2차대전 이후 쏘련과 미국간의 냉전가운데서 ‘열전’으로 발산된 첫 번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도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나라에서 일어 난 명분도 분명치 않은(나치의 서유럽 침공이나 일본의 진주만 폭격에 비교해 보면) 전쟁이었지만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1950년대 아시아의 공산화 시도는 쏘련의 세계공산화 음모의 첫 단계로 보았던 것이지요.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대와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고 3년의 전쟁기간 동안 1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의 지원이 2차 대전 후 창설된 UN의 깃발아래 수행되었으며 공산국가 북조선의 군대와의 싸움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전쟁 초기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매파 의원들이 주도하는 의회 그리고 TIME지의 Henry Luce 같은 언론인들이 주도하는 미국의 분위기는 공산주의에 대한 전면전으로 모택동의 중공을 공격하여 승전하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버렸으며 오늘날은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20여 년 동안의 루즈벨트와 트루만의 민주당 정권이 닺을 내리고 아이젠하워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와싱톤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헌법의 규정은 없었지만 와싱톤이 만든 선례에 의하여 4년 임기 2회 이상의 중임을 금기 시 하여 불문율로 지켜져 왔습니다만 대공황과 2대 대전 참여가 계속되면서 일관된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루스벨트의 4선 출마까지도 허용하면서 그를 당선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미 의회는 미 수정헌법 22조를 제정하여 4년 임기 2회 이상 중임할 수 없으며 전임자의 유고로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2년 이상을 봉직하였을 때는 1회로 간주하여 1회만 중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수정헌법 제정시의 대통령은 이 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이 들어 있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의 잔여 임기 3년 이상과 한차례 중임을 한 트루만 대통령은 1952년 재출마를 초기하였든 것입니다.

한국전 전쟁일지 

1950년 6월 25일 쏘련에 의하여 훈련 받고 무장한 9만 여명의 북한 군이 38선을 넘어 침공하였다. 다음 날 트루만 대통령은 미 해군과 공군이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침공 3일만에 북한군은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정전을 촉구하는 첫 번째 결의안이 9대 1로 통과됨. 당시 유엔 주재 쏘련 대표는 안보리가 중공(Communist China)이 아닌 국부(Nationalist China)군을 인정하는데 항의하여 안보리 참석을 거부하고 있던 중 이어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몇 일 후 안보리는 다시 유엔군을 보내어 한국을 지원키로 결의.

6월 30일. 미 태평양지구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지상군 지원을 요청. 트루만 대통령은 지상군 지원과 미 해군의 한국해안 봉쇄를 명하고 미국에서의 징집령을 1년 연장.

7월 8일. 유엔에서 맥아더 장군을 한국주둔 유엔군 사령관으로 인준. 미군이 주축이기는 하였지만 16개국의 군대가 참여하여 유엔군을 형성하였다.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미군들은 지상전에서 패배를 거듭하였다.

7월 20일. 미 25사단의 흑인부대가 예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한국전에서의 미 지상군의 첫 번째 승리였다. 그리고 당시 ‘흑인들을 싸움을 못한다’는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을 고쳐준 ‘흑인민권운동’에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반전되어 서울을 탈환하고 9월 29일에는 38선에 다달았다. 유엔군의 목적은 침공한 북한군을 남한 땅에서 격퇴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강행하여 납북을 통일하려는 생각이었고 이것은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든 맥아더 장군과 와싱톤의 국방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와싱톤의 지시는 중공과의 충돌은 피하라는 것이었다

10월 7일. 침략군을 격퇴하는 데서 공산정권 붕괴로 전략을 바꾼 유엔군을 38선을 너머 북으로 진격하였다. 중국의 공산정권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으나 미국은 그들의 협박을 무시하였다.

10월 20일. 유엔군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만주와의 국경인 압록강에 도달하였다.

11월 1일. 중공군이 한국군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고 11월 4일에는 대규모 공세를 감행, 맥아더 장군은 북한에서의 미군 철수와 함께 지상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공세를 강화.

12월 16일.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군대를 350만 명으로 증강하도록 지시.

12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중국 본토 공격과 원자탄 사용을 주장하면서 중국 국부군 50만 명을 본토에 투입할 것을 주장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 맥아더 장군이 중국본토의 병참기지 폭격을 허용하지 않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대한 불평을 토로.

3월 14일: 유엔군을 재 정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중공군을 국경선(38선) 밖으로 격퇴.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이 공개적으로 트루만 대통령의 평화협상계획을 비난하자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한국주둔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

7월 10일.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유엔과 중공간의 평화협상에 참여. 현 단계에서 전쟁을 종결하고 양쪽 체제를 지속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52년 11월 4일. 평화회담이 결렬되고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와 닉슨이 정,부통령으로 당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선거공약대로 12월 8일에 한국에 있는 군인들을 방문하고 정전회담을 재개토록 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전쟁은 처음 시작되었든 38선에서 휴전되다.

한국전쟁의 결과.

한국전쟁으로 5만 4천 여명의 미군이 전사하였고 10여 만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약 2백 만 명의 한국인들이 전쟁 중 사망하였습니다만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상황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쟁과 수많은 인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한국의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쏘련과 치열한 냉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군수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재래식 군비와 원자력이 크게 증강되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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