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5
2008/6/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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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제5절)-제2차 대전의 전개과정과 전쟁의 종결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6월 15일>

제 6 장 번영과 좌절과 대국에로의 안착

제1절. 1차 대전 이후의 사회상
제2절. 좌절하는 시민들과 대공황의 시작
제3절.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탈출작전
제4절.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제5절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과정과 전쟁의 종결

전쟁 일지

1938년 9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뮤니히(Munich)조약으로 첵코를 위시한 독일 남부 일대를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에 병합시키는데 동의. 영국의 챔벌린(Chamberlain)수상은 이것으로 유럽대륙에 평화가 올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후에 수상이 된 처칠(Churchill)은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를 선택하였고 결국은 전쟁을 택하였다”고 비난.

1939년 9월 3일 계속되는 독일의 도발행위와 폴란드 침공에 대항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정식으로 독일에 대한 전쟁을 포고하는가 하면 영국상선이 독일 잠수함의 어뢰정에 침몰되면서 미국시민 2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미국은 여전히 중립을 선언. 1940년 3월 18일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펼칠 것을 선언하고 노르웨이, 덴마크, 벨지음, 네델란드등 유럽일대를 침공하는가 하면 6월에는 프랑스를 침공 파리를 함락하고, 7월 10일에는 독일 공군의 대규모 영국 폭격이 시작..

1940년 6월 10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중립포기”를 선언하고 항공기들을 영국에 지원하는 한편 9월에는 미국 장정 징집령을 선포.

1940년 11월 5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3선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으며 12월 29일 “노변담화”를통해전쟁준비체제로의 전환을 선포하고 민간공장들을 군수공장으로 환원, 전쟁물자를 생산 영국과 유럽대륙에 공급하기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미국의 산업들은 대공황의 늪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 활기를 되찾았다..

1941년 6월, 미국은 독일과 이태리의 자산을 동결하고 대사관들을 폐쇄, 양국의 외교관들을 추방하였으며 7월에는 일본의 자산들을 동결하였다. 11월 주일 미국대사가 일본의 기습적인 공격의 가능성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으나 별 대책을 세우지 못한 가운데 12월 7일 일본 전투기들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사건이 일어났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 이에 대응하여 독일과 이태리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언, 미국은 결국 일본, 독일, 이태리 3개 동맹국들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1942년 1월 26일 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미군이 유럽에 도착하였으며 2월 20일에는 미국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콜로라도, 유 타, 알칸소 등에 있는 집단 수용소로 이전시켰는데 전쟁이 끝나기까지 10만 여명이 집과 재산을 잃고 집단 수용되어 있었다. 3월 11일 일본군의 침공을 받은 필리핀에서 맥아더 장군이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는말을 남기고 오스트리아로 떠났으며 4월 9일에는 필리핀에 남아서 필리핀 군대와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던 7만5천명의 미군들이 일본군에 투항 포로가 되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대공황이 끝나고 모처럼 살림살이가 풀리려나 하였으나 전쟁물자 조달로 인하여 내핍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 5월에는 생필품의 가격을 통제하고 개스를 배급제로, 12월에는 커피를 배급제로 하였으며 다음해(1943년) 2월에는 신발도 1년에 3켤레로 제한하고 4월에는 고기, 기름, 치즈까지도 배급제를 실시하고 임금과 연봉 그리고 가격 등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43년 5월 아프리카에서 미, 영 연합군과 독, 이 동맹국간에 35만 명의 동맹군과 1만8천5백 여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격전 끝에 동맹군들이 패퇴하였으며 7월에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16만 여명의 동맹군 사상자와 2만 5천 여명의 연합군 사망자를 내는 격전 끝에 지중해 일대를 장악 유럽대륙 공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44년 3월 6월 미 공군이 처음으로 독일 베를린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하였으며 6월 6일을 D-Day로 ‘놀만디 상륙작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연합군의 유럽대륙 상륙작전이 벌어져 4일간의 격전 끝에 상륙에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 동원된 함선이 4,000척, 전함이 600척, 1만대의 전투기 그리고 17만 5천명의 연합군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일뿐 독일이 꼼작 없이 두 손을 들기까지는 1년여나 더 걸렸다. 독일은 상륙작전 성공에 보복이라도 하듯 6월 13일 미국에는 없는 신병기 ‘유도미사일’을 영국으로 발사하였으나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연합군은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가 1940년 6월 독일에게 빼았겼던 파리를 탈환하였다. 10월 20일에는 1942년 3월 일본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떠났던 맥아더 장군이 2년 반 만에 다시 복귀하였다.

1944년 11월 7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욕 주지사 도마스 듀이(Thomas Dewey)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45년 2월 1일, 1천여 대의 미 폭격기가 베를린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는 가운데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소위 ‘얄타(The Yalta Conference)회담을 통해 전후의 대책을 협의,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UN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1945년 3월 여섯 명의 해병들이 섬 꼭대기에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으로 2차 대전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오지마( Iwo Jima) 전투에서 미군은 6,800명이 죽고 2만1천명이 부상당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승리함으로 태평양 연안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일본본토 침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4월 21일 와병 중이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트루만(1884-1972) 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트루만 대통령은 V-E Day(유럽에서 승리한 날)로 선포하고 독일은 미, 쏘, 영, 불이 4분하기로 하였다.

1945년 6월 21일, 미군은 오끼나와에 상륙하였으며 트루만 대통령은 8월 6일, 7월 16일 막 실험을 끝낸 새로운 폭탄 ‘원자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도록 허가하고 8월 9일에는 나까사끼에 투하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15일 일황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으며 9월 2일 미조리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정식 서명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피해상황

제2차 세계대전은 승전국이나 패전국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5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많은 희생을 가져다 준 전쟁 이였습니다.

7백5십만의 러시아군, 3백5십만의 독일군, 1백2십만의 일본군, 2백 2십만의 중국 군 전사자 외에도 거의 1백만 명에 육박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병사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민간인 희생자들은 그보다 훨씬 많아서 전쟁에 죽은 러시아인들 만도 2천 2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며 독일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만도 6백만, 다른 인종들이 1백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미국만도 30여 만 명의 전사자에 70여 만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물질적인 손실은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긍정적 측면으로 서방국가와 쏘련 사이에 협력체제가 이루어지고, 전쟁을 방지하고 국가간의 평화를 도모할 기구로 유엔을 창설하였으며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시함으로 감히 전쟁을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합니다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기나긴 ‘냉전’(The Cold War)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전쟁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얄타 회담과 FDR의 죽음

러시아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와 헝가리를 탈환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히틀러 친위대를 압박하여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가려던 1945년 2월, 태평양에서의 전투는 비록 일본이 패퇴하고는 있었지만 언제 끝날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3대 연합국의 영수인 루즈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Yalta)궁에서 모였습니다. 대공황과 전쟁의 어려운 기간 12년을 집권해 온 루즈벨트 대통령은 4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얻었지만 그의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회담에 임하는 루즈벨트의 심중에는 세계평화를 위해 유엔(United Nation)이라는 상설기구를 만드는 것과 러시아를 설득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케 함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끼여 항상 전쟁의 제물이 되 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도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스탈린을 설득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느냐는 것으로 당시만 해도 특수무기 개발계획(원자탄 제조를 위한 Manhattan Project)이 추진단계에 있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최소한 50만 내지1백만 명의 미군손실을 각오하여야 한다는 것이어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성사시킬 가치가 있는 것이 러시아의 참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루즈벨트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스탈린은 반 일본 동맹에 참가하여 참전하는 조건으로 만주와 몽고의 지배권 그리고 북부 일본연안에 있는 사할린과 쿠릴 섬의 영토화와 함께 적당한 선에서 조선의 영토 일부를 활에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앞으로 창설될 UN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을 가진 상임이사국 자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회의기간 내내 건강문제로 시달리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고 유럽에서도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국민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독립정부를 세워주겠다는 스탈린의 약속만 믿고 동유럽 일대를 러시아에 넘겨주는데 동의하고 러시아의 참전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래의 세계평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어쩌면 미국이 주동이 되어 창설하는 UN을 통해서, 그리고 앞으로 4년이나 남은 임기 동안 자신이 직접 개입함으로 전후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돌아온 지 두 달만인 4월 12일 휴양 중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대공황과 나치와의 전쟁 그리고 제2차 대전의 격랑을 헤치며 미국을 이끌어 온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미국사람들에게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으며 미국역사상 와싱톤, 링컨 다음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던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지위향상에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유럽에서 벌어진 인종대학살(홀로코스트)사건에도 강대국의 수뇌로서 충분한 관심을 보이자 않았다는 비판과 함께 사전 경고가 있었음에도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진주만 공격을 받은 데 대해서도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역사는 그에게 무척 우호적입니다. 당대의 히틀러나 무쏠리니에 못지 않는 전권을 가졌음에도 미국을 인종주의나 군국주의로 밀고 가면서 독재자의 길을 가지 않고 경제적, 심리적으로 건강한 나라를 만들며 전쟁에 휩싸인 세계를 위해 전쟁에 적극 참여함으로 미국이 세계의 구세주로 우뚝 서도록 한데에는 루즈벨트의 지도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꼭 원자탄을 투하하여야만 했는가?

이미 50여 년이 지났음에도 8월이 오면 미국은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은 목소리를 높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자탄 투하 사건은 지금까지도 과연 꼭 필요한 조치였느냐? 하는 논란이 역사가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론은 역사가들의 몫 이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판단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본토에 미군이 상륙, 점령하기 위해서는 50만 명 내지 1백만 명의 미군 희생을 감수하여야 하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무라이 전통과 가미가제 정신으로 무장한 6백만 일본군들과 죽창으로 무장되어 있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일본 본토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여 년의 게릴라전을 감수하여야 하리라는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의 보고서와 2만 톤의 파괴력을 가진 폭탄이 제작되어 실험에 성공하였다는 보고서를 받아 든 트루만 대통령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를 상륙작전을 1백만 미군의 희생을 각오하고 시행하느냐 아니면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그 결과를 기다려 보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비인도적인 조치라는 비난을 면키는 어렵지만 미국민의 안전을 우선하여야 하는 대통령에게 지난 5년 동안 계속 골탕을 먹여 온 일본 본토에 있는 시민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요. 평범한 인간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내릴 수 있는 온당한 결정이었든듯 합니다. 미 군사 전문가들이 그렇게 강하다고 평가하였든 일본군이 10여일 만에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세계를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 넣었던 전쟁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역사의 한 장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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