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4
2008/6/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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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제4절)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6월 1일>

제 6 장 번영과 좌절과 대국에로의 안착

제1절. 1차 대전 이후의 사회상
제2절. 좌절하는 시민들과 대공황의 시작
제3절.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탈출작전
제4절.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탈출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던 1930년대에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정세는 파시즘(fascism)의 대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30년대 파시스트들의 득세

파시스트 하면 1922년에 이태리의 무쏠리니(Benito Mussolini)에 의하여 시작되어 1943년 패전과 함께 해산되어 버린 무쏠리니 운동의 추종자들을 생각합니다만 파시즘이란 호전적인 군국주의를 특성으로 하는 일당 독재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통제 국가 조직이나 주의를 통칭하는 것으로 강력한 민족주의나 인종차별에 기반하고 있으며 공산국가들과는 달리 비지네스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20세기의 첫 번째 독재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잘 아는 대로 이태리의 무쏠리니 입니다. 1922년 수상에 오른 그는 제1차 대전 참전용사들을 동원하여 반 공산주의와 격렬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애국단체를 조직하고(검정셔츠를 착용하여 blackshirts라고 불렀음) 국가질서를 혼란케 하는 좌파나 반대세력들을 강압적으로 억압하면서 자신은 1925년에 일당 체제 국가에서 당수로 취임합니다. 그리고는 1차 대전 이후 어려운 경제상황 가운데서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군비를 축소하는데 반해 옛 로마의 권위와 영광을 기치로 이태리의 재무장을 실시합니다. 그는 선동정치로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모든 이태리의 문제들이 외국 때문에 생긴 것으로 선전하고 국내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압박으로 전제국가로서의 길을 갔습니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는 1930년에 추종자들을 결속하여 국가사회주의 정당(Nazi)을 만들고 독일의 경제적인 난국은 유대인들과, 맑씨스트 그리고 외국세력들에 의한 것이라며 실업자들의 지지를 얻어내 의회를 장악하고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된 비슷한 시기에 수상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군대와 비밀경찰을 장악하고 군수산업의 지원하래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선동정치를 강화 하여 파시스트 지도자로서의 길을 닦아 갔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1차 대전 후 1918년 벨사이유 조약으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자는 기치 아래 1935년부터는 대대적인 군 재정비작업을 단행하였습니다

1935년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다음해 스페인에서 프랜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이 반정을 일으키자 독일과 함께 군대를 보내어 당시 쏘비엣의 후원을 받는 정부를 전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도 미국은 대공황 탈출작전에 여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외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국내의 강력한 고립주의 정서 때문에 1935년에 ‘중립법안(Neutrality Act)’을 제정하고 중립과 고립의 입장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은1937년 7월 중국 본토를 침공하여 북경을 점령합니다. 이때에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밖에서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 당사자에 대한 분명한 지적 없이 “미국은 평화를 원하며 침략자의 ‘자제’를 권고한다는 정도의 성명만 내고 맙니다.

미국의 불개입 자세를 간파한 히틀러는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9월에는 1918년 첵코에게 귀속되었든 독일 남부지역을 돌려줄 것을 요구, 영국과 프랑스는 순순히 그의 요구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야욕의 시작에 불과하였든 것입니다.

저항이 거세지 않은 것을 확인한 히틀러는 1939년 첵코의 나머지 부분을 합병하고 다음에는 폴랜드로 옮겨 폴랜드의 항구도시 단스크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는 쏘비엣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합동으로 양쪽에서 폴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를 달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루즈벨트 대통령도 대륙의 상황에 나 몰라라 하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만 1935년에 제정된 ‘중립법안’을 폐기시킬만한 표를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 여름 히틀러가 덴막, 놀웨이, 네델란드, 벨지움 그리고 프랑스등의 저항세력들을 분쇄하여 서부 유럽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도버해협을 경계로 영국과의 최후 결전을 준비하게 되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편법으로 미국에 있는 제1차 대전 패전국의 자산을 동결하여 독일이 전비로 사용하는 것을 막고 미국의 잉여무기들을 영국에 파는 한편 영국의 기지사용권의 대가로 미국의 낡은 폭격기들을 보내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영국 지원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대전 이후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시민들과 의회의 고립주의 정서는 여전히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1940년 12월 17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값을 따지기 전에 호즈를 빌려주어 불을 끄게 하고 나중에 호스를 돌려 받는 게 이웃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호소하면서 “미국의 안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는 미국이 탱크나 비행기나 배들을 빌려주고 전쟁이 끝난 후에 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하는 ‘Lend-Lease Bill’을 의회에 상정, 통과시킴으로 영국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루즈벨트 대통령은 무척 힘들고 긴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공황 수습에 매여 있던 그로서는 유럽사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으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제1차 대전의 피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고립주의 정서가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이 세계의 전쟁을 부채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루즈벨트가 취임하기 전 후버대통령시절인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였을 때 미국은 침묵을 지켰고 상해를 점령 하였을 때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을 본 히틀러가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은 그 후의 점진적인 유럽대륙 침략전쟁으로 나타났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일본의 대 미국 공세

극동 아시아에서 서구의 문명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자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으로의 진출야욕을 키우면서 먼저 조선을 합병하고 1930년에는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는 등 본격적인 동남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도서들에 대한 야욕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야욕은 19세기 말 하와이를 합병하고 필립핀을 점령하면서 태평양에로의 진출을 시작한 미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강행 북경을 점령하였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려의 뜻을 표명하였으나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기에 완곡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1937년 양자강에서 미국의 전투함이 일본의 포격으로 침몰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두 나라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배 하나 때문에 전쟁을 할 만큼 미국이 여유롭지가 못했습니다. 그저 중국정부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일본에 대한 전쟁물자를 금수조치 하는 것으로 그치자 일본은 그들의 동남아시아 지배야욕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가를 과시하듯 남경 대학살 사건을 위시하여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국무장관은 모든 점령지에서 일본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Hideki Tojo(1884-1948)장군이 이끄는 매파 군부가 일본을 장악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점점 확대 되어갔습니다.

미국이 한편으로는 공식적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싸우는 영국을 지원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폭격기들이 휴일의 적막 속에 쌓여 있는 하와이의 해군 기지를 기습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폭격으로 19척의 배가 침몰되거나 부셔졌고 292대의 비행기가 부셔졌으며 2,400여명의 군인들과 시민들이 죽고 1,200여명이 부상당하는 대 참변이었습니다. 다음 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을 공식 선포하였으며 당시 일본과 보호조약을 맺고 있던 독일과 이태리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 미국은 고립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태리, 일본 세 나라의 연합군들과의 전쟁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미국이 어떻게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그러한 계획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가로 막고 있는 ‘고립주의 정서’를 바꾸기 위해서 그만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일본의 폭격을 방치함으로 당장에 미 전역을 참전무드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진주만 폭격 1년 전부터 주 일 미국대사로부터 일본의 폭격가능성을 경고하는 보고서가 발견되었다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폭격을 방관한 게 아니라 미국의 힘에 대한 과신과 아시아의 자그마한 황인종 국가를 얕잡아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같이 작용하여 주일 대사만이 아니라 다른 정보기관들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감히 자그마한 일본이 미국에 도전해?”하다가 당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에서의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영국을 돕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 관련 정보도 소홀히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정확한 분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주만 폭격 다음날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을 때 참전을 가로막고 있던 고립주의자들과 참전논자들간의 오랜 논쟁은 자취를 감추고 만장일치로 참전에 동의하였고 미국은 전쟁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전쟁 메세지(1941년 12월8일)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 미 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하여 면밀하게 준비된 공격을 갑자기 받았습니다. 미 합중국은 일본과는 평화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에 따라 태평양상에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대화를 일본 정부와 일본 천황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하와이 공격으로 미국 해군과 군대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 왔으며 수많은 미 국민들이 생명을 잃게 되었다는 보고를 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일본 정부는 마라야에 대한 공격도 시작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필립핀도 공격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웨이크(Wake) 아일랜드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은 미드웨이 (Midway) 아일랜드도 공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제공격을 격퇴하는데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미국 국민들은 그들의 정의로운 힘으로 절대적인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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