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3
2008/5/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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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제3절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공황 탈출작전  

<늘푸른나무/역사로 배우는 미국/2008년 5월 15일>

제 6 장 번영과 좌절과 대국에로의 안착

제1절. 1차 대전 이후의 사회상

제2절. 좌절하는 시민들과 대공황의 시작

제3절. ROOSEVELT 대통령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탈출작전

날로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12년간의 공화당 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의 유명한 취임사에서 “솔직하고 대담하게 진실을 이야기 한다면 지금은 매우 중대한 시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솔직한 상황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위대한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그랬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잘 견디어 왔고 또 잘 견디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 번영을 이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름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은 두려움으로 움츠렸든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우리들의 노력을 마비시키는 공포심을 갖는 것이라고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공포심을 갖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으니 공포심을 떨쳐 버리고 난관을 극복하자는 결의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탈출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기를 마련한 100일 작전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선거 공약이었든 뉴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100일 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경제상황은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월 5일 대통령에 취임한 루즈벨트는 뉴딜(New Deal)이라는 혁명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취임 첫날 위기상황에 있는 전국의 은행들을 위해 4일간의 휴가(holiday)를 선포하고 취임 첫날밤에는 후에 ‘노변잡화(爐邊雜話)로 유명해진 라디오를 통한 fireside chats를 시도하여 국민들에게 경제상황의 실상과 은행들의 사정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들의 공포심을 다독이면서 거의 사라져간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특별의회는 3월부터 6월까지 100일 동안에 수많은 새로운 조치들을 통과시켰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조치들은 다 취하였는데 그의 대처방식을 어떤 역사학자는 “하나의 방법을 택하여 시행해 보고, 그게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식”이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뉴딜 정책이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여 대 공황을 퇴출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뉴딜 정책가운데는 성공한 것도, 실패한 것도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새롭게 시도한 데에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먼저 착안한 것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력(人力, human resources)이었습니다. 그는 CCC(Civilian Conservation Corps) 란 기구를 창설하여 18세부터 25세의 젊은이들에게 국가의 산림을 회복 보존시키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또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란 기구를 만들어 전에는 개인 대기업들이 맡아 하던 수력발전소나 댐 건설, 산림 조성사업이나 위락시설 공사 등을 정부가 직접 개입함으로 사회주의적인 공산체제로 간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전통적인 미국적인 생활방식에 혁명을 가져 오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예금주들을 보호하기 위한 연방준비은행(FDIC)이 설립된 것도 이때였으며 주택소유주들의 저당물 유실처분(foreclosure)을 예방하기 위해 재 융자를 해주는 Home Owners Loan Corporation, 금융가의 활동을 규제하는 Federal Securities Act가 제정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1933년 5월에는 FERA(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를 창설, 5 억달러를 투자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하였는데 현재의 연방 사회복지프로그램(federal welfare program) 의 시작입니다. 또 1934년에는 SEC(the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을 조직하고 당시 금융가에서 악명이 높던 케네디(Kennedy, 현 케네디가의 조부?) 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금융가의 각종 속임수(trick)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뉴딜 정책의 완결판으로 제정된 것이 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입니다. 기업들의 생산을 증진시키자는 의도로 제정된 이 법에서는 생산, 노동, 경비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법안은 기업주, 노동자, 소비자들에게서 많은 반발과 저항을 받았습니다만 무난히 통과시킴으로 대공황 퇴치 100일 작전이 일단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 공황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경제를 진작하기 위한 일연의 법적 조치들을 끝낸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이 결정적인 대 공황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것 못지 않은 역사적인 전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독립을 선언한 이래 연방정부의 권한을 최소화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주 정부와 관련이 있을 뿐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들은 좋건, 나쁘건 간에 연방정부가 유례없는 정도로 미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개인의 힘이나 경제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정부에 의존하여 해결한다는 것은 이전의 미국 풍토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대의 미국인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국가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일연의 연방기구들을 만들었다고 해서 “미국을 모스코바로 끌고 가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기 회복을 가져온 대규모 연방 토목, 건설 공사

뉴딜 정책들이 100일 동안에 쏟아져 나왔지만 경제침체는 기대한 것만큼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생산이나 소비도 소폭 상승에 그쳤고, 실업자율은 계속 10%대를 윗 돌고 있었으며 1930년대에는 미 중서부지역에 가뭄이 심해서 흙모래바람를 일으키는 바람에 농부들이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5년 WPA(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연방정부 주도의 토목, 건축사업을 벌렸습니다. 1939년에 The Works Project Administration으로 이름을 바꾼 이 기구는 Harry Hopkins(1890-1946)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새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병원, 학교, 정부청사, 상,하수도 시설등 대규모 공사들을 통해 실업자를 흡수하고 돈이 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대대적인 처방에 의해 경제는 서서히 되살아 났고 그때 지은 토목공사로 인해 현재 미국이 자랑하는 많은 시설들이 건설되었습니다. 뉴욕시와 뉴 저지주 사이의 허드슨강을 지하로 연결하는 링컨턴넬, 만하탄과 롱아이랜드를 연결하는 다리들과 맨하탄의 FDR드라이브가 이때 건설되었으며 워싱토 디씨의 연방 상무성 건물, 포트 낙스에 있는 금 저장소, 1946년 공화당 의회에 의해 후버댐으로 이름이 바뀐 네바다의 보울더(Boulder) 댐 그리고 겨울철에 수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있는 후로리다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Key West의 일연의 섬들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들도 이때 건설되었습니다. WPA는 토목사업 이외에도 예술가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어려운 시기에 수 천명의 음악가, 작가, 미술가들을 고용하여 예술활동을 계속 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공황 탈출작전을 이야기 하면서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지적되는 것은 그의 재빠른 입법활동이나 대담한 조치들 보다 심리적인 영향(기여)입니다. 그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불안 속에서 헤매는 국민들에게 정부의 대책을 신뢰하게 만들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면서 희망을 갖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취임 첫날 저녁에 시도하였든 ‘fireside chats’를 매주 계속하면서 마치 대통령이 응접실로 찾아와 이야기 하고, 위로하고, 알려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줌으로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과 희망을 되살려 주는 제3절역할을 톡톡히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과 같이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그때까지 공화당을 지지하였든 대부분의 흑인들이 이때 루즈벨트의 민주당으로 돌아서서 그를 따랐으며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민주당의 텃밭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법원과의 힘겨운 싸움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공황 탈출 작전이 국민들의 환호 속에서 순탄하게 이루진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공화당원인 보수적인 증권가나 기업인들에게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내 쏟는 정책들이 입에 쓴 처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치들이었습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심하였습니다. 루즈벨트가 Dutch계 유대인이라든가 성병에 걸려 불구가 되었다는 등의 루머가 난무하였습니다만 1934년의 중간선거에서는 집권당이 약하다는 전통을 깨고 더 많은 의석으로 힘을 강화하였으며 1936년 재선에서는 60%가 넘는 득표율로 진보적인 공화당원이 캔자스 주 지사였던 알프 앤든(Alf Landon)을 가볍게 물리치고 재선되었습니다. 이때 유권자들의 관심사는 정당이나, 공약이 아니라 FDR(루즈벨트 대통령의 약칭)를 지지 하느냐, 않느냐 뿐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적수를 만나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 많은 보수적인 공화당원들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방 대법원은 잇따라 뉴딜정책으로 입법화된 안건들에 대하여 위헌판결을 내렸습니다. 국토회복청(NRA(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이 위헌판결을 받아 문을 닫게 되었으며 농촌진흥청( AAA(Agriculture Adjustment Administration), 안전과 환금 법안(the Securities and Exchange Act), 석탄 법안(a coal Act), 파산법안(Bankruptcy Act) 등이 위헌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법안을 추진하였으나 의회의 반발을 사 루즈벨트 이름으로 제출한 법안이 취임 후 처음으로 의회에서 부결되는 제재를 감수하여야만 했습니다.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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