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0
2007/12/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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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쟝 대재난을 향해 달리는 아메리카 제1절 멕시코와의 전쟁  

<김상신 칼럼-역사로 배우는 미국>

제4장 대재난을 향해 달리는 아메리카-남북전쟁과 재건-

북아메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13개주가 연합하여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 미국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3류 국가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링컨대통령에 이르는 70여년 동안에 아메리카 합중국은 급격한 팽장을 거듭하면서 세계 1류 국가로 부상하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영토는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되었고 강대국들의 위협이나 인디안들의 위험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산업화로 이루어진 생산품의 대량 생산과 영토확장으로 주어진 충분한 농경지 확보 그리고 캘리포니아 노다지에서 건저낸 금의 확보등으로 국가의 富는 어느나라 보다도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의 확보와 함께 발명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면서 전 미주에 철로가 부설되며 큰 도시들을 연결하였으며 증기선 역시 선을 보이면서 강들을 통해서, 운하들을 통해서 내륙 깊숙히 증기선들이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의 다양한 농기구들의 발명은 광활한 영토를 개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신, 전화가 발명되어 대륙을 연결하게 된것도 이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와 같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외향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는 70여년동안 하나의 커다란 종기가 치유책을 찾지 못한채 점점 더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북전쟁의 참상을 가져 온 노예문제 였습니다. 천부의 인권을 주장하며 새로운 국가를 선언하였지만 노예산업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로 잘못된 것임을 심정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원칙에 입각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때 그때 타협에 의한 미봉책으로 문제의 핵심을 피하여 온 70여년이였습니다.

이장에서는 미국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였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배경적인 사건들과 전쟁의 전개과정 그리고 재건에 관한 것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과 남북전쟁, 무언가 잘아는듯한 익숙한 용어들이면서도 막상 아는것들은 추상적이고 전설적인 것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1절 멕시코와의 전쟁

아메리카는 영국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한 이래 수많은 전쟁들을 치루었으나 그것들은 독립을 이루기 위한, 외국의 부당한 간섭에 항거하기 위한, 또는 지정학적인 불가피한 사정때문에 치루지 않을 수 없는 전쟁들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와의 전쟁은 순전히 영토확장을 위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라는 비난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Ulysses S. Grant 장군은 "이 전쟁이야 말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인 가장 불공정한 전쟁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취임후 한달만에 감기로 사망한 William H. Harrison 를 승계한 John Taylor 의 임기가 끝나게 되자 북 캐롤라이나 출신의 노예소유자인 James K. Polk가 1844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잭슨대통령과 링컨 대통령 사이에 아메리카를 이끌었던 8명의 대통령들 가운데서 가장 유능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는 폴크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영토확장이요 그것은 곧 멕시코와의 전쟁을 의미하였습니다.

폴크는 텍사스는 원래 루이지아나 일대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할때 거기에 포함되어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재 탈환하여 '재병합'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취임도 하기 전에 의회에 텍사스 통합안을 제출, 의회로 하여금 가결토록 하였습니다.(사실은 텍사스가 루이지아나 매입에 포함되는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결론이다). 이 소식을 접한 멕시코는 1845년 3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텍사스가 미국에 소속된 지역이라며 폴크는 1845년 5월 1,500여명의 군대를 국경지대에 파견하고 다음해(1846년) 정월에는 3,500여명의 군대를 추가 파견하여 Rio Grande를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그해 4월 멕시칸들이 미국의 정찰병들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을 선포하고 의회는 5만 병력을 추가 지원토록 결의 함으로 멕시코와의 전쟁은 본격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입니다.

폴크 대통령은 태평양과 컬프만의 멕시코 항구들을 봉쇄하고 오레곤 지역을 둘러 싸고 분쟁중이던 영국과 서들러 위도 49도선으로 국경을 정하는데 합의, 영국과의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멕시코와의 전쟁에 전념하였습니다. 1846년 6월에는 역시 멕시코 영토였든 캘리포니아 일대를 합병하고, 8월에는 역시 멕시코 영토였든 라스 베가스에 진군, 뉴 멕시코 일대를 합방하는등 멕시코를 압박해 갔습니다.

1848년 초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서 후에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뉴 멕시코,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그리고 텍사스주가 된 50만 평방마일의 멕시코 영토를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멕시코와의 국경을 Rio Grande로 확정하고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불하도록 합의함으로 전쟁은 2년 8개월만에 끝났습니다.

멕시코 전쟁은 Manifest Destiny(분명한 운명) 의 꿈을 완성시켜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메리칸들로 하여금 해안에서 해안까지(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다스리도록 맡기셨다는 일반의 신념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무렵인 1848년 정월, 뉴저지로부터 공사차 샌프랜시스코 근처에 와서 일하고 있던 James Marshall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물속에서 빤짝이는 노란 돌조각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1849년 캘리포니아 황금 러시를 불러 와 수십만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의 노다지를 찾아 몰려들었고 그후 몇년동안에 캘리포니아 언덕에서 2억불의 가치에 달하는 황금을 추출하여 냈습니다.

멕시코 전쟁은 영토의 확장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중요한 다른 후유증은 가져다 주었습니다. 영토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경작할 토지와 함께 노예들의 장래에 대한 문제가 크게 대두된 것입니다. 북부 공장지대의 반 노예주의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노예제도를 연장하고, 영속화하려는 의도로 전쟁을 일으켰다며 반전운동을 펼쳤습니다. 종전과 함께 반노에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멕시코 전쟁의 또 다른 후유증은 많은 미국의 젊은 장교들이 실전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관학교 출신 젊은 장교들이 실전을 통해 유능한 군대 지휘관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결과는 멕시코 전쟁때 동료로 함께 싸우던 그들이 15년후 남북전쟁때 양쪽 군대의 중견 지휘관으로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유능한 군대지휘관들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정치가들이 벼랑끝 작전을 감행하다가 비극적인 전쟁에 까지 이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세기 상반기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고 하는 아메리칸의 이상이 초월주의 작가들이라고 알려진 뉴 잉그랜드의 문인들을 통해 문학으로 꽃피어진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가 Ralph Waldo Emerson 입니다. 목사 출신의 에머슨은 유럽을 모방하지 말고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개성과 직감적인 영성을 추구하라고 강조하며 산업화된 도시가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제자요 친구였든 Henry David Thoreau 는 스스로 도시사회에서 떠나 매사츄세츠의 산골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인도의 간디에게 영향을 주어 '시민 불복종' 개념을 개발하게 하였고 간디의 사상은 후에 마틴 루터 킹목사의 '비폭력'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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