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8
2007/11/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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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제5절 잭슨시대의 개막과 대중민주주의의 정착  

<역사로 배우는 미국>

제3장 한 국가로의 도약

제5절 잭슨시대의 개막과 대중 민주주의의 정착

한국에서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양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호비방적인 네거티브 선거전이 도를 넘었다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어쩌면 열띤 경쟁 가운데서도 질서가 잡힌듯한 지명전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처음부터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총 한방 안쏘고도 외교를 통해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는가 하면 일전도 불사하면서 영국과의 영토분쟁과 해상의 만행을 저지한 미 합중국은 산업화와 '서부로'의 물결을 타면서 국제적으로는 '몬로주의'를 천명할만큼 위상이 향상되었고 국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노래할만큼 희망과 설레임에 쌓였습니다.

잭슨시대의 도래

그러나 정치판의 모습은 무척 달랐습니다. 연방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미국 정치권력은 제퍼슨때에 민주공화당으로 넘어 갔으며 몬로대통령의 태평성대로 민주공화당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연방주의 정당은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결국 두차례 임기를 마치는 몬로의 후임을 뽑는 1824년의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후보들끼리의 열전이었습니다. 몬로 대통령의 국무장관이였든 John Quincy Admas 는 원래 연방주의 정당 소속 대통령이었든 제2대 죤 아담스의 아들이지만 민주공화당의 유력 후보였으며 그외에도 특히 인디안 토벌에 큰 공을 세운 테네스주의 상원의원인 Andrew Jackson 과 켄터키주 출신 하원의장 Henry Clay가 끝까지 열전을 벌였습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인신공격이 판을 치게 마련인데 아담스는 영국인 마누라를 가진 별찾은 왕정론자로, 잭슨은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하여 살인자로 그리고 크레이는 술주정꾼이요 노름쟁이로 폄하하는 비난들이 난부하였습니다. 초기의 신사요 학식 많고 교양 있는 훌륭한 대통령의 이미지가 귀족들의 노름판에서 진흙탕 정치판을 거치는 동안 살인자,주정꾼, 왕정론자로 크게 실추 되고 만것입니다.

거기에다 선거결과 잭슨이 1위, 아담스가 2위가 되었으나 둘 다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회에서 결선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크레이가 같은 남부 출신 잭슨이 대통령이 되면 자신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판단에서 하원의장으로서의 영향력을 동원 북부출신인 아담스를 밀어 당선시키고 자신은 아담스의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거래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잭슨 지지자들은 둘 사이에 '부정한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잭슨은 크레이를 '서부의 유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1824년의 대통령 선거는 네가티브 선거공세, 지역주의, 부정거래등이 판 친 선거로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몬로의 태평성대도 사라지고 서민들의 불평과 분노가 이글거렸습니다. 이러한 논란속에 취임한 아담스는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하여 재선에 실패하고 단임 대통령으로 물러 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1828년의 대통령 선거도 아담스와 잭슨간에 인신 비방의 네가티브 선거운동이 치열하였지만 잭슨이 여유있게 아담스를 물리치고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미국역사가들은 잭슨의 승리와 취임으로 새로운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평가하며 그것을 잭슨의 민주주의라 부르는데 그 특징은 소위 민초(grassroots movement) 들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귀족풍의 부유층들의 지원 아래 출범한 미 합중국은 대지주나, 대상인 우선의 정책을 펴왔으나 민주공화당의 제퍼슨은 귀족출신이면서 대통령이 되는데 상류층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농민이나 소상인 중심의 정치를 펼치면서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잭슨은 서부의 여러주들이 토지를 소유해야만 주는 투표권을 폐지 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한 덕분에 고아 출신에 개척지로 떠돌며 인디안들과 싸워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에 땅투기꾼임에도 지난 선거에서의 '부정거래'에 분노한 서민들과 새로이 선거권을 얻은 민초(grassroots) 들의 지원 아래 그들의 상징이요 우상으로 떠올랐고 무난히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버지니아 귀족 출신도 아니고 뉴 잉글랜드의 명문가의 사람도 아니였습니다. 그는 북동부 귀족세력의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노동자, 농민, 서부개척자들의 지원으로 당선되었기에 역사상 첫번째 남부 출신인 그의 대통령 당선과 취임은 새로운 민주주의 역사를 열어 가리라는 기대로 가득 했고 또 한편으로는 공로를 세운 서민들의 요구 역시 대단하여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느라 무리한탓에 '엽관제도(spoils system)' 란 것이 잭슨정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눈물의 행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만 컬럼버스가 산 살바돌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유럽인들과의 관계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우수한 무기와 인원을 가지고 회유과 무자비한 살육 그리고 약속파기와 배신으로 인디안들을 몰아냈습니다. 잭슨은 인디안들과 맞서 용감하고도 잔인하게 전공을 세움으로 1814년경부터 전사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고 인디안들에게는 "날카로운 칼'이라는 불릴만큼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지금까지 내려 왔던 인디안들에 대한 국가정책을 바꾸어 그의 후임자 밴 뷰렌에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은 싸워 죽이거나 쫒아 내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를 옮기는 "移住"정책이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정책변경이라고 두둔하기도 하지만 인디안들에게는 "눈물의 행진"이었습니다.

남부지역에는 Choctaw, Chickasaw, Creek, Cherokee 그리고 Seminole 등 5개 인디안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인들에 필적할만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당시 갑자기 수요가 폭등하게된 목화농장을 일구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였습니다. 이들 5개 개화된 인디안 종족들을 대상으로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제1차 '이주'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목은 '이주' 이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살륙을 감행한 강제적인 이주였습니다. 한 겨울에 미시시피 에서 알칸소 서쪽의 변방으로 도보로 이주하는 이들에게 음식도 주거시설도 열악한 상태에서 뉴모니아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더운 여름철에는 코레라로 죽어 가는 죽음의 행진이였습니다.

이주를 거부한 Creek 부족들은 1835년 전쟁으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14,500여명이 붙잡혀 그중 2,500명은 쇠사슬에 묶인채 오크라호마까지 이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개화되었던 체로키 종족은 독립된 인디안 국가를 세우고 대법원에 법적 소송을 제기하면서 저항하였으나 밴 뷰렌 대통령시절인 1838년 15,000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되었으며 4,000여명이 이주하는 동안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애트란타에서 테네시와 켄터키를 거쳐 오하이오와 미주리강을 건너 지금의 오크라호마로 가는 그 길을 "눈믈의 발자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장 가력하게 저항하였든 부족은 후로리다의 Seminole 족이였는데 이들과의 전쟁에서 1500여명의 미국 군대가 죽을 정도로 치열한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은 이들도 인디안 지역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잭슨의 대중민주주의와 양당정치의 재건

1832년 뉴욕의 정치가 Martin Van Buren 를 부통령 후보로 쉽게 재선에 성공한 잭슨은 상류계층이나 대기업들에 대하여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으면서도 백인 서민층을 위한 경제적인 기회를 극대화 하고(필요하다면 인디안들을 쫒아 내고 농장의 일거리들을 만들면서) 전례 없이 선거권들을 확대하여 중,하위 계층에 정치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습니다. 연방정부의 권한에 대하여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 강력한 연방정부를 주장하면서도 주정부에 대한 과도한 간섭권은 제한하려고 하였습니다.

의회의 지도자였던 Daniel Webster 와 Henry Clay가 제퍼슨 대통령 당선 이후 연방주의 정당의 몰락으로 거의 일당 체제였던 정치판에 주정부의 보다 강혁한 권한을 주장하면서 반 잭슨 세력을 규합 1834년에 새 정당을 만들고 Whigs당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Whigs란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추구는 Patriots들이 독재자 영국왕실에 충성하는 Tories에 대비하여 자신들을 지칭하던 이름으로 독재자 잭슨왕(당시 친구나 정적들이 다 그를 그렇게 불렀다) 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갖다 붙인 이름이였습니다. 이들은 1836년 선거에서 밴 뷰렌에게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디프레이션으로 인기가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하던 밴 뷰렌의 발목을 잡아 인디안 토벌의 영웅이었든 해리슨 장군을 1840년 대통령에 당선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후 한달만에 감기에 걸려 사망하고 부통령이었든 버지니아 출신 John Tayler 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전임 대통령의 유고로 대통령에 오른 첫번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텍사스주의 미 연방 편입.

잭슨시대만 해도 텍사스의 대부분은 멕시코 영토였습니다만 그 광활한 지역에 사는 멕시코인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미 연방은 이 지역을 매입할 뜻을 멕시코 당국에 알렸으나 그들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도리어 아메리칸들을 초청이민 형식으로 받아들여 개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첫번째로 아메리칸들을 데리고 텍사스에 들어간 사람이 Stephen F. Austin으로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은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아메리칸 백인들의 유입이 1830년에는 20,000여명에 이르럿고 목화재배를 위해 데리고 간 노예들이 2,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텍사스가 멕시코 연방에서 탈퇴할것을 선언하고 멕시코 헌법을 위반하고 노예를 계속 사용하자 멕시코 대통령 Sant Anna 는 1836 년 6,000 의 군대를 데리고 출동하여 텍사스 아메리칸들의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San Jacinto에서 잠자는 동안에 기습을 당하여 수백명이 죽고 Sant Anna 대통령을 포함하여 수백명이 붙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텍사스 아메리칸들은 자체 헌법을 만들고 멕시칸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이끌었던 Houston 을(미국의 4번째로 큰 도시 휴스턴의 이름이 여기에서 왓다) 대통령으로 새로운 공화국을 선포한후 미 연방과의 합병을 청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그의 임기 마지막날 독립국으로서의 텍사스를 인정하였을뿐 합병에 대하여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멕시코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텍사스의 병합이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문제에 대한 논란이 가열될것을 두려워 하였든 것이 중요한 원인이였습니다. 지난회에서 본대로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의 13개 주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남부의 13개주가 팽팽하게 균형을 맟추고 있는데 노예들을 사용하고 있는 텍사스를 받아들일 경우 균형이 깨어짐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우려하였든 것입니다. 잭슨이 퇴임한후에도 텍사스 문제는 9년동안이나 계속 해결되지 못한채 노예문제에 대한 남북의 대립을 격화시키며 멕시코와의 관계는 전쟁 일보전까지 이르렀습니다.

19세기 상반기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열기는 "서부로'를 웨치는 영토확장이였습니다. 신의 섭리에 의하여 주어진 이 대륙을 개발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종교적인 사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동기는 한 몴 잡으려는 '욕심' 이였지만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전 대륙을 지배하려는 아메리칸들의 욕망은 성스럽기까지 한 것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초대 와싱톤 대통령에서부터 9대 해리슨 대통령까지 아메리카가 어떻게 형성, 성장하여 왔나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올라 갔다 내려 왔다 하는 굴곡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대통령의 통치 기간이 순조롭고 업적을 이루며 인기가 있었다면 그 다음 대통령은 어려움을 당하고, 업적도 세우지 못하고 때문에 인기도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한가지 아메리카 역사의 주역들이 성인 군자들이 아니라 평범하고 사악하기 까지한 보통사람들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국민들을 이끈 훌륭한 자도자들이 있어 퇴보보다는 발전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한 결단을 미루고 미봉책으로 넘겨 왔던 문제들이 결국은 폭발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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