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
2007/11/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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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 국가로의 도약-제1절 헌법을 제정하고 한 국가로의 틀을 잡아가는 미국  

<김상신 칼럼>역사로 배우는 미국

제3장 한 국가로의 도약

제1절 헌법을 제정하고 한 국가로서의 틀을 잡아 가는 미국

아메리카 합중국이 1776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이후 8년동안이나 계속되어온 전쟁의 총성이 멎자 세계의 열강들은 앞 다투어 미국이 독립국임을 추인하였습니다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볼때 아메리카는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모습이였습니다. Articles of Confederation 에 기초한 여러주들의 느슨한 연합체일뿐 통치자(왕이나 대통령)도 통수권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어떠한 형태의 국가를 지향하고 통치권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가'하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여러 주들은 너무나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혁명이 끝나고 남북전쟁이 시작되기까지(70여년 동안) 아메리카는 역동적인 힘으로 급격하게 확장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로서의 형틀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최대 위기였던 남북전쟁의 씨앗도 함께 뿌려졌든게 사실입니다.

Shay(쉐이)의 반란

독립전쟁이 끊나자 아메리카의 경제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일때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었고 군수품을 만드느라고 공장이 부지런히 돌아갔으며 군대는 보급품을 사들여야 했고 월급을 받는 군인들은 나름대로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아메리카의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갔든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끊나자 군인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인프레이션과 경제공황이 닥쳐 왔습니다. 전쟁비용으로 얻어다 쓴 외채가 막대하였지만 연방정부는 세금을 부과할 권한마저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토마스 제퍼슨이 '조그마한 반란'이라고 불렀든 민중의 반란이 마사츄세츠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도 농민이나 노동자등 못가진자들이 상류계층을 상대로 반란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국에 줄을 대고 있는 지배계층이나 부유층에 대한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 일어난 반란은 농민, 노동자, 노예,소상인 그리고 노예신분을 벗어난 흑인등 식민지의 못가진자들이 지주, 노예소유 귀족층 그리고 대도시의 국제무역상등 가진자들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아메리칸들의 같은 아메리칸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1780년 마사추세츠 의회는 일방적으로 가진자들에게 유리한 주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든 대륙군대 출신들에게 전쟁보상금도 지불하지 않은 상황에게 그들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법율을 만들었으며 경제가 악화되면서 빛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농토를 차압하는 일들이 빈번하였습니다. 지방경찰이 흥분한 농민들로부터 차압법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병대의 지원을 요청하면 도리어 농민편을 들기가 일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1786년 퇴역군인 출신 Daniel Shays가 700여명의 농민과 노동자들을 이끌고 Springfield 에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때 앞장 서서 영국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선도하므로 이제는 보스톤의 유지가 된 Sam Adams가 시위참가자들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체포할 수 있다는 '시위방지법'을 작성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군주에게 반항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공화국에 반항하는 것은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라는 것입니다.

Shays는 무장한 천여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부와 권력이 자리 잡고 있는 보스톤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보스톤의 상인들은 돈을 지불하고 용병을 고용하여 한때 워싱톤 휘하의 지휘관이였든 Benjamin Lincoln 장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진압토록 하였습니다. 아마츄어였던 반란군들은 무력충돌에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면서 맥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은 도마스 제퍼슨은 그의 유명한 명구 "조그마한 반란은 때로는 좋은 것이기도 하다 . . .자유의 나무는 때로는 독재자들과 애국자들의 피를 먹으며 새롭게 자라는 것이 틀림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헌법회의란 무엇인가

The Article of Confederation 에 기초하여 수립된 아메리카 합중국은 전쟁이 끝난후 몇년을 지나는 동안 보다 강력한 연방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폭동을 진압하고 외국군대의 공격을 막아 내며(당시 북미대륙에는 스페인 군대와 영국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서쪽으로 내몰린 인디안들의 언제 있을지 모르는 공격에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연방정부의 힘이 필요한것은 물론 아메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해외 무역의 붕괴와 전후 경제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새로운 연방정부의 틀이 필요하다는데 지배계층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소집된 의회에서는 죠오지 와싱톤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4개월에 걸쳐 헌법제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대표들은 혁명기간중 의회에서, 전장에서 활동하든 사람들로 Patrick Henry 같은 사람은 대표단이 "시민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개화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언급하였으며 James McGregor Burns 같은 사람은 이들은 "좋은 집안에 태어났으며, 잘 양육되었고, 잘 교육을 받았으며, 결혼을 잘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의 새로운 귀족계층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들 대표들은 다양한 대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북부지역의 부유한 상인들과 남부의 노예를 부리는 부유한 농장주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200여년간 이들이 제정한 '헌법'에 의한 통치를 경험하고 나서의 결론은 '미국헌법'은 입법의 귀재들이 모여 만든 가장 완전한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문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헌법제정 당시나 오늘날이나 한결같이 정치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은 타협의 기술에 있습니다. '미국헌법'은 정치적 이상주의와 정치적인 편의주의를 잘 균형 맟춘 일련의 기술적인 협상을 통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데 다같이 동의합니다.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에, 북부와 남부간에 그리고 노예를 합법화한 주와 노예를 금지한 주사이에 충돌의 소지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헌법제정 작업에서 끝까지 문제가 되었든 것은 첫째로 의회에 보내는 대표의 수자를 인구비례로 할것이냐? 아니면 각 주가 동수의 대표를 보낼것이냐?하는 것으로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에 이해가 상반되는 것이였습니다.

둘째는 노예문제로,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노예폐지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데도 남부의 주들은 완강하게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뿐 아니라 인구비례로 대표를 뽑을때 흑인노예들 까지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하여 Roger Sherman 이 타협안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을 커네티커트 타협안 또는 대 타협안이라고 부릅니다. 이 타협안에 의하여 각주 동수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상원과 인구비례로 대표되는 하원 양원제가 채택되었는데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는 양원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노예문제에 있어서도 두개의 타협안이 채택되었는데 향후 20년동안(1808년까지) 의회가 노예문제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과 인구비례 대표를 뽑을때 노예들의 5분지 3을 인정하여 계산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대표를 뽑을때 완전히 무시되였든 노예들이 5/3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헌법의회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무엇보다도 행정부와 대통령의 권한에 관한 것이였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권한이 한 사람 군주의 손에 쥐여있는 영국의 왕정에 대항하여 싸워온 대표들은 대통령에게 큰 권한을 주는데 대체로 반대하였습니다만 강력한 연방정부를 지지하는 Hamilton 같은 사람은 대통령의 종신제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자는 안에 대해서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지사들이 모여 선출할것을 제안하는등 의견들이 분분하였습니다. 결국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워싱톤에 대한 의원들의 신뢰감이 작용하여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로 낙착되었으나 대의원 선거방식은 각 주에 일임하는 대통령 선거제도가 확정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뉴욕주지사 Morris 가 작성한 헌법 최종안이 1787년 9월 17일 회의에 상정되어 단 세표의 반대표만 받고 절대다수의 찬성가운데 통과되어 각 주의 인준절차를 받게 되었습니다. 헌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사람 가운데는 George Mason 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퍼슨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할때 주로 참고하였든 '버지니아 권리선언서'(The 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라는 것을 작성한 사람으로 미 헌법을 초안하는데에도 많은 역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협상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여함으로 노예들에 대한 부당한 타협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관철되지 않자 헌법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역사에서는 잊혀져 갔습니다만 그가 끝내 관철하려고 하였던 내용들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였으며 아메리카의 역사가운데 계속 논의되고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미국헌법이 고도의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라면 미국헌법의 특징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너무 강한 권력을 갖는 것을 원치 않은 헌법 설계자들은 연방정부의 권력간의 견제를 통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입법부는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입법부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또 대통령은 대법관을 임명하되 의회의 인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제도적인 견제를 통해 3부가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것이 미국이 자랑하는 3권 분리이며 이것은 이미 건국선조들에 의하여 미 헌법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미 수정헌법이란 무엇인가?

1787년 9월 의회에 상정되어 통과된 미 헌법은 참여한 모든 주의 인증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중앙정부에 의하여 주정부들이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습니다. 물론 헌법에 구체적으로 그러한 우려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조처로 Madison이 12항목의 수정조항을 만들어 1789년9월에 의회에 제출하였고 1791년 12항목중 10항목이 통과 인준되었는데 그것을 수정헌법이라고 부릅니다.수정헌법에서는 인간의 기본 권리들을 보장하였다고 하여 권리장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원래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이란 1689년 영국에서 "국민의 권리 및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정하는 법율"로 13개 항목의 기본 권리를 선언한 것이 효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권리란 것들이 매우 제한적이고 의회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는 것이였든데 비해 미국의 권리장전인 수정헌법은 매우 포괄적이고 참가한 주들의 동의에 의해서만 취소될 수 있는 것으로 원래의 헌법에서 구체적으로 거명되지 않은 자유를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헌법학자들은 이 조항들은 논리적으로는 불필요한 것들이지만 헌법의 조항으로 제정되었고 미 역사상 계속하여 논란의 핵심이 되어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권리장전에서 보장된 규정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가요?

수정헌법 제1조항은 종교,언론,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2조항은 무기를 소지하고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보장하며
제3조항은 군인들이 주인의 동의 없이 가옥에 주둔할수 없도록 하는 주택 불가침권 보장.
제4조항은 부당한 압수,수색,구금의 방지와 영장제도의 보장.
제5조항은 적절한 재판 절차를 받고 2중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 보장.
제6조항은 공정하고 신속한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 보장.
제7조항은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 보장.
제8조항은 과다한 보석금이나 벌과금의 부과 금지 및 잔혹한 형벌의 금지.
제9조항은 헌법에 특별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기본 권리 보장.
제10조항은 연방정부에 특별히 위임되지 않았거나 주정부가 특별히 갖지 못하도록 규정되지 않은 권력은 주정부나 인민에게 귀속된다는 보장등입니다.

총기 난사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는데도 무기 구입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 하나 못만드는 미국 정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줄 압니다만 거기에는 로비스트들의 영향도 있지만 수정헌법 제2 조항에 의하여 보장된 기본 권리이기 때문에 연방헌법만으로나 주 헌법만의 개정으로 결정 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라는 데에도 이유가 있읍니다

1790 년도 아메리카의 인구동태

아메리카에서는 1790년에 '인구조사'안이 통과되어 1790년 8월 미국 역사상 첫 인구조사가 시행되었습니다. 몇가지 통계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미합중국의 전체인구수는:3,929.625명
*흑인 인구수: 노예 697,624명 자유인; 59,557)
*제일 큰 도시는 필라델피아로 인구 42,000명, 두번째 도시는 뉴욕으로 인구 33,000명
*가장 인구가 많은 주는 버지니아로 인구는 820,000명
*인구의 48.5 % 가 남부주들에 살고 있었으며 나머지가 뉴 잉글랜드와 중부 여러주에 분포
*아메리카의 인구는 아주 젊은층으로 백인 1,000명중 490명이 16세 이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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