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
2007/10/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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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제4절 아메리카의 독립전쟁  

<늘푸른나무/김상신의 역사로 배우는 미국(편년체 통사)>

제2장 영국식민지 시대의 북 아메리카

제 4절 아메리카의 독립전쟁

무엇이 독립을 선언하도록 이끌었나?.
독립선언서와 연방규약에 나타난 정신
어떻게 미 식민지가 영국을 이길 수 있었나?

1775년 4월 18-19일 사이에 마사츄세츠주의 렉싱톤과 콘코드에서 처음 울린 식민지 애국자들과 영국군대간의 총성은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으로 울려 퍼졌으며 무력적인 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번져갔습니다. 5월에는 뉴욕주의 Fort Ticonderoga에 있는 영국군 무기고가 민병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Lake Champlain에 있는 영국군 수비대가 기습을 당하였습니다. 6월 15일에 소집된 식민지 제2차 대륙회의는 연방군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죠오지 와싱톤을 책임자로 임명하였습니다. 같은 6월의 Bunker Hill전투에서는 영국군 1,100여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1776년에 들어서면서 3월에는 반란군들이 보스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Dorchester Heights를 장악함으로 영국군들을 보스톤에서 완전히 쫓아내었으며 그해 6월에는 독립선언문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영국이 William Howe장군으로 하여금 32,000여명의 병력을 뉴욕주의 Staten Island에 상륙시켜 결전을 준비하는 긴박한 상황가운데 7월 4일 정식으로 독립선언서를 채택 발표하였습니다.

그후 와싱톤이 이끄는 독립군은 뉴욕과 뉴져지등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서부 뉴저지와 펜실바니아로 퇴각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만 그해 크리스마스날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의 Trenton 영국군 병영을 공격하는데 성공함으로, 비록 조그마한 성공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선언한 미국민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그가 배를 타고 델라웨어를 건너는 그림은 오늘날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해를 넘겨 1777년 4월에는 커네티커트 주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6월에는 해군을 조직하여 해상에서 영국 함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8월에는 버몬트주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으나 9월 워싱톤 군대가 필라델피아에서 Howe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계속 패배를 당하면서 당시 필라델피아에 자리 하고 있던 '대륙의회'가 피난을 가야 하는 어려움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워싱톤의 대륙군대가 펜실바니아주의 Valley Forge에서 월동을 하면서 혹독한 추위와 기아로 10,000여명 군인가운데 2,500여명이 죽는등 '독립'에로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연방국의 독립에로의 행진에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제국들의 지원과 격려였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1778년 2월에는 미국과 상무협정과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그해 7월에는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미국을 돕기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해인 1779년 6월에는 스페인이 미국을 직접 돕지는 않았지만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언함으로 영국의 압박을 늦추는 역활을 하였습니다.

독립을 선언한지 3년후인 1779년 7월에야 뉴욕주의 스토니 아이랜드를 다시 탈환하고 뉴저지의 Paulus Hook에서 영국군들을 몰아내었으나 죠오지아주의 사바나를 탈환하려든 미-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는 가운데 대륙의회는 1778년 7월 연방법안을 조인하고 1779년 9월에는 영국과의 평화협상을 하도록 John Adams를 지명하였습니다.

뉴 잉글랜드와 뉴욕주등지에서 근거를 잃은 영국군들이 1780년 부터는 남쪽 North Carolina 와 죠오지아쪽으로 옮기면서 전쟁의 무대도 남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1년여간의 끌고 당기는 전쟁끝에 영국군의 캐로라리나 침공작전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맙니다.

1781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프랑스 지원군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그해 9월 9,000의 미국군대와 7,000명의 프랑스 군대가 연합하여 Yorktown을 포위 공격 20여일만에 8,000여명의 영국군이 항복하면서 미국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1782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에 있던 친영국 계통 사람들이 지금은 카나다 영토인 Nova Scotia 나 New Brunswick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고 2월에는 영국의회가 미국에서 더 이상 전쟁하는 것에 대한 반대결의를 하고 왕에게 평화협상을 위한 전권을 부여하였으며 왕은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즉각 미국과의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해 11월 파리에서 평화 가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783년 1월에는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스페인간에 평화 가협상이 체결되었고 그해 2월 4일 영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적대관계에 종식을 고한다는 선언을 하였으며 4월에는 미 연방의회가 혁명전쟁을 정식으로 종결한다는 선언을 하고 그해 6월 대륙군대를 해산 1783년 9월 3일에 파리조약에 싸인함으로 정식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7년만에 이룬 명실상부한 독립인 것입니다.

무엇이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나?

독립전쟁 당시 미 식민지 주민들은 대부분 영국 이민 1세와 2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영국에는 친인척들이 살고 있었으며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문화적인 유대감이 강하여 1774년 제1차 대륙의회가 소집되었을때만 해도 영국과의 관계에서 신중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세계 최강의 영국인으로서의 모든 특권과 권리를 포기하고 막강한 영국에 대항해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선언을 하도록 식민지의 분위기가 바뀌었을가?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만 다음의 두가지를 중요 요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첫째로 꼽히는 설명이 영국정부의 오판과 거기에 따른 잘못된 조치들이 급격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영국정부는 미 대륙의회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대신 식민지와의 무역단절을 선언하는등 유화책이 아니라 강경책을 구사하였으며 식민지에 보낼 군대의 충원이 여의치 않게되자 독일에서 사들여 온 용병들을 영국 정규군과 함께 보냈는데 그들은 난폭한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12,000여명의 용병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식민지에서 더 이상 영국과의 타협이란 불가능하다는 분위기로 급냉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식민지에서는 영국군에서 떠나 미대륙에서 살기를 원할 경우 땅을 제공하겠다는 유인책을 내놓았는데 많은 용병들이 여기에 호응하면서 영국군의 전력이 약화된것이 전쟁중에 혁명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1776년 정월 'Common Sense(상식)'라는 팜프렛이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피뢰침을 발명한것으로 유명한 벤쟈민 프랭크린이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에게 부탁하여 쓰게 한 것으로 간단하면서도 우려한 필체로 '왜 미 대륙이 독립을 하여야 하는가?'를 웅변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세습적인 왕권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영국과 화해하자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독립이 가져 올 경제적인 이익까지도 수치를 들어가며 명쾌하게 설명함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독립을 결의하기 전에 워싱톤을 위시하여 대륙의회원들이 모두 이 책을 읽었으며 미 전역에서 당시 노예들까지 합쳐서 300만이였든 인구에 비해 50여만권이 인쇄되였다니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출판물에 의해 대중의 여론이 형성된 첫번째 실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독립선언서와 아메리카 연맹 법조문에 나타난 내용들

1776년 6월7일 대륙의회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선언(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급진적인 개혁파인 John Adams 와 Ben Franklin, 보수적인 뉴욕의 Robert Livingstone과 코네티커트주의 Roger Sherman 그리고 중도파인 버지니아주의 Thomas Jefferson등 5인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저명한 문장가였던 제퍼슨이 초안을 작성토록 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는데 물론 수정을 거쳐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만 여기에서 다가올 역사적인 비극의 싹을 뽑아 버리지 못하고 남겨 두는 우(遇)를 범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 제퍼슨의 초안에는 노예무역에 대한 책임이 왕에게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노예들로 인해 경제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남부의 대표들과 이들에게 가세한 일부 북부의 대표들에 의해 삭제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워싱톤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의원들이 가정에서 노예를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노예 해방 내지 철폐의 의지가 있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첫 단계에서 잘못 끼워진 단추는 100년후에 남북전쟁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바로잡게 되었든 것입니다.

독립을 선언한 대륙의회는 어떠한 형태의 정부를 가질것인가?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하여 연맹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원칙은 느슨하게 조직된 연방정부입니다. 대표권과 선거권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인구비례로 할것이냐 아니면 주별로 동등하게 할것이냐?에서부터 전쟁이 진행되면서 주마다 다른 형편들이 이견을 낳게 하였습니다. 1777년에 재안된 초안이 1781년에 가서야 통과되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살아남기에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정부였습니다. 대통령은 권력이 전혀 없는 자리이고, 의회는 세금을 부과할 권력이 부족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정부에 어떠한 권리를 주어야 할런지가 불투명했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의회가 나름대로 보완해 나갈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식민지가 이길 수 있었으며 독립을 선언한 아메리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였든 영국의 군대가 민병대 또는 반란군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같은 식민지 군대에 패퇴하고 말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으시는지요?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퇴하고 대 이락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어쩌면 이해하기가 좀 쉽지 않을가 생각됩니다만 한번 짚어 보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영국군대는 병력과 물자를 수천 마일 밖에서 조달하여야 하였으며 당시의 수송수단 역시 별로 신뢰할만한 것이 못되어서 지원군 증원에 많은 차질을 겪었고 영국정부는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여야 했습니다. 자연히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쟁에 대한 본국의 백성들과 지도층의 여론이 갈리게 되고 지지도 미온적이 되였습니다. 한편 반란군은 유럽대륙에서 영국과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던 국가들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군대와 돈과 물자가 없었다면 아메리카가 독자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역사가들이나 전략가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혁명군이 사용한 화약의 90%가 프랑스에 의해 공급되었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왜 아메리카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을까요?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왕정을 거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선포한 아메리칸들과 이념이 맞아 편들어 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단지 승승장구하던 영국에 어떻게 하여서든 한 방 먹여야 겠다는 복수심과 7년전쟁으로 영국에 빼았긴 영토들을 회복하려는 전략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혁명의 성공적인 성취에 고무된 프랑스 민중들이 몇년후에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종식시켰다는 사실은 프랑스쪽에서 볼때에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아메리카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든 것은 현지의 영국군 지휘관들의 계속적인 작전 실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전쟁 초기에 영국군은 반란군들을 완전 격파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일보 앞에서 멈추곤 하였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만약 독립을 선포하였든 아메리카가 전쟁에 패하였다면 신대륙은 영국의 식민지로 계속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No"입니다. 아메리카의 독립은 역사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시기가 도달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잇달아 일어난 혁명들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혁명은 역사에서 절대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초 강대국이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귀중한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만 그 교훈을 종종 잊고 있는게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파리 평화조약으로 The unites States of America의 독립이 공식으로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경계가 확정되었습니다. 대서양에서부터 미시시피강 동부의 모든 지역외에도 스페인 지역이였든 후로리다와 뉴 올린스를 차지하였고 북쪽으로는 퀘백과 노바 스코티아를 경계로 남부를 차지함으로 지역적으로 매우 거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8년동안의 전쟁기간중 1,300여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며 2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전쟁비용으로 외국에 진 부채가 1천만$이 넘었으며 국내 부채까지 합치면 6천500만 $에 이르러 건국 초기 수년동안 독립을 유지하는데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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