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
2007/10/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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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제3절 미 독립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늘푸른나무/김상신의 역사로 배우는 미국(편년체 통사)>

제2장 영국식민지 시대의 북 아메리카

제3절 미 독립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영국의 미숙한 식민지 정책들
보스톤 Tea Party
1,2 차 미 대륙회의

150여년동안 영국의 식민지로서 착실하게 성장 발전해온 북미 대륙은 13개주의 형태를 갖추고 오랜 기간동안의 프랑스와 인디안들을 상대로한 전쟁에서 영국군대를 도와 승리를 거두며 명실상부한 최대 강국 영국의 식민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3년밖에 지나지 않아 식민지의 치안을 지키는 영국군과 식민지 거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식민지 13개주로 번지면서 프랑스와 싸울때 영국군을 지휘하였던 죠지 와싱톤이 이끄는 식민지 군대의 선전으로 북미합중국의 독립을 선포함으로 미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면 13년이라는 짦은 기간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당시 셰계 최대강국인 영국을 상대로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수 있는 사건이 터진것일까요?

역사적인 사건들이란 복합적인 요인들이 합쳐져서 어떤 시점에서 폭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두가지로 설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독립을 설명할때 미국사람들이 가장 즐겨하는 기존의 전통적인 설명은 아메리칸들은 영국의 시민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웠다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인 정치적, 경제적 설명은 미 대륙의 부(富)를 먼곳에 있는 영국의 엘리트들의 손에서 현지에서 자라난 미국인들의 손으로 분명하게 옮겨 놓으려는 싸움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영국 정부의 미숙한 대처나 경제적인 실제 여건, 소위 말하는 계몽사조라는 철학적인 배경, 역사적인 필연성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되겠지요.

영국의 미숙한 식민지 정책들

영국정부는 프랑스와 인디안 전쟁(유럽에서는 7년전쟁이였다)이 끝나자 미대륙의 프랑스군들을 격퇴하기 위한 전쟁이였으니 미 식민지가 경비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의당 하여야 할 일이라면서 1764년에 미국으로 수입되는 설탕, 커피, 포도주등에 관세를 메기는 Sugar Act 라는 것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때 미 식민지는 식민지대로 전쟁경비를 감당하느라고 상인들이나 소비자들이 어려운 상태여서 그러한 조세에 대한 반발이 심했습니다. 여기에 급진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못하는 한 세금부담은 있을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반세금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영국은 더욱 식민지에 대한 압받을 강화하기 위해 1765년에는 신문에서부터 법적인 증명서류까지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Stamp Act를 시행하자 미국인들의 저항이 더욱 커지고, 강해지면서 폭력의 양상을 띠어 폭동으로 번졌으며 영국산 불매 운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식민지의 불매운동에 당황한 런던 상인들의 진정으로 Stamp Act를 폐기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드는듯 하였으나 1767년 영국정부는 새로운 Townshend Acts란것을 제정하고 원만한 시행을 위하여 반대운동의 진원지인 16,000주민의 보스톤에 4,000여명의 영국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물론 저항운동은 수그러들었지만 이들 군인들이 보초만 서는 것이 아니라 부두를 중심으로 웬만한 노동일들은 직접 하였기 때문에 안그래도 일자리 사정이 좋지 않던 보스톤에서 노동자들과 영국군대간에 충돌이 잦았고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770년 4월에는 급기야 영국군인들이 쏜 총에 노동자 5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보스톤 대학살사건'이라고 부르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순교자'로 추모하면서 장례식에는 16,000 보스톤 시민가운데 10,000여명이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 영국군은 철수하고 Townshend Acts 는 폐기되어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평화를 되찾고 경제도 호전되는듯 하였습니다.

Boston Tea Party

그런데 1773년 영국의회는 미국에 대한 차(tea) 수출권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독점시키는 결정을 내립니다. 미국상인들의 권리를 짤라버리는 조치였지요. 지금은 차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독점권을 인정할것이냐?는 우려가 식민지에서는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1773년 11월 동인도회사의 차를 실은 배 3척이 보스톤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보스톤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Samuel Adams와 미대륙의 제1의 부호가운데 하나로 동인도회사 독점권이 시행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John Hancock(오늘날의 John Hancock회사나 삘딩은 그의 이름을 딴것임)등이 식민지의 동지들과 힘을 합쳐 이 차들을 항만에 부리지 못하도록 각종 조치를 취하는 한편 당시 마사추세츠 주지사였든 Hutchinson은 아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차를 내리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대치속에서 1773년 12월 16일 보스톤의 백인들이 Mohawk인디안으로 변장을 하고 이들 화물선에 올라가 차들을 보스톤만에 집어던졌읍니다. 차가 얼마나 많았던지 물을 다 채우고 배의 갑판까지 올라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Boston Tea Party라는 것으로 이 소식이 퍼지자 다른 식민지에서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났으며 결국은 식민지에서나 영국에서 다같이 강경로선이 득세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때 영국측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식민지 사람들을 미국에서는 patriots라고 부르며 영국측에 선 사람들을 loyalist Toris 라고 부르는데 뉴 잉글랜드 football팀의 이름을 'The Patriot'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름에서 나온것입니다.

보스톤 티 파티 이후 patriot 들은 더 담대해졌고 loyalists들은 더욱 영국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영국의회는 이들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George왕은 이러한 사태에 진노하여 수상인 North 경에게 "주시위는 던져젔다. 식민지에는 항복 아니면 승리가 있을뿐이다"고 강하게 지시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휘두른 조그만 주먹에 얻어 맞고 쇠덩이 같은 주먹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1, 2차 대륙회의

죠오지왕의 강경방침에 따라 영국의회는 여러가지 강압조치들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는 보스톤 항구를 폐쇠하려는 항만법이라든가 식민지설립허가서를 대치하는 마사츄세츠제재법안, 카나다에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세우고 카나다의 국경을 오하이오강까지 확대시키는 퀘벡법안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을 시행하기 위하여 Thomas Gage 장군을 마사츄세츠주의 새로운 지사로 임명하고 4,000여명의 영국군대를 같이 보내면서 군대의 숙식을 식민지 정부가 담당하도록 하는 숙식활당조치까지 내렸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이러한 법안들을 '견딜수(감당할수) 없는 법안'이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식민지의 의회들이 대륙회의를 소집하기로 하고 대표들을 선출하여 1774년 9월 5일부터 10월 26사이에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는데 이것이 제1차 대륙의회로 죠오지아주를 제외한 12개주에서 온 56명의 대표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들 대표가운데는 식민지에서 내노라하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다 들어 있어서 당장 영국과의 단절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타협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면서 영국과의 유대를 끝까지 지켜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치된 결의안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달 반동안의 진지한 토의를 통해서 신중하면서도 억압조치들에는 단호한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국물자 뽀이코트를위한 연합체 조직과 함께 식민지 백성들의 권리와 대륙의회의 권리를 규정하는 10개 결의안들이 들어 있었읍니다.

제1차 대륙회의는 정회하기 전에 만일 그들의 요구사항이 영국정부에 의하여 시행되지 않을 경우 제2차 회의를 소집한다는 결의를 함으로 비록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으로의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매사츄세츠의 새 지사로 부임한 Gage장군은 반군(영국군에 반대하는 식민지 군대 , 민병대)들을 초장에 진압하기 위하여 민병대들이 총이나 무기를 구입하는 비밀 가게들을 색출하고 보스톤 티파티를 뒤에서 조장한 John Hancock과 Sam Adams를 체포하려 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매사추세츠 전역에 걸체 반 영국계(이들을 patriots라고 불렀다)의 농민들과 도시 사람들로 총기를 다루는 훈련을 받게하고 연락만 있으면 몇분 이내에 전투 준비를 완료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 두었든 민병대(이들을 minutemen이라고 불렀다)와 영국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수십명이 죽고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전투가 일어났든곳이 마사추세츠주의 Lexington 으로 미 전역에 걸쳐 Lexington이란 이름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것은 이러한 도시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제2차 대륙의회가 1775년 5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습니다. 이미 식민지와 영국군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고 뉴 잉글랜드의 민병대들은 보스톤의 영국군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샤추세츠의 의원인 John Adams는 다른주들, 특히 남부주들의 일사불란한 지지와 지원을 받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 죠오지 워싱톤을 1775년 6월 15일 새로이 조직된 대륙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지명함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인디안들과 프랑스군들을 소탕하는데 영국군으로 가담하여 큰 공을 세우고 종전과 함께 군대를 떠났던 죠오지 와싱톤은 15년만에 다시 이번에는 영국군과 싸우는 식민지 군대의 사령관으로 복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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