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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27(금)
미국의 포경 산업  
<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9년 9월>

미국의 포경 산업

고래잡이는 17세기에 시작해서 남북전쟁(1861-1865)이 발발할 때까지는 미국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다. 미국 항구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향해 참고래와 향유고래를 찾아 출범하는 포경선이 700여척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만하다.

포경원정은 때로는 몇 년씩 걸리는 것으로 높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때로는 수백마리의 커다란 고래들을 잡아 오기도 한다. 일단 고래가 작살에 찍히면 기름을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졸이며 19세기 미국에서는 그 기름들을 램프에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19세기 말 석유산업이 자리잡힐 때까지 기계의 윤활유로도 사용하여 수요가 무척 많았다. 한편 고래의 뼈들은 자동차에 장착한 안테나나 우산의 부품 또는 공예품 자료등으로 사용하였고 여성들의 옷감으로도 사용되었다.

19세기 초에 미국포경업의 중심지는 매사츄세츠 주의 낸투켓(Nantucket) 섬에 있는 뉴 벧포드(New Bedford)와 컨네티커트 주의 뉴 런던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는 포경업의 중심이 샌프랜시스코로 옮겨졌다. 미국포경선의 선원들은 국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프리칸, 아세안, 미국태상 캐리비안 등이 섞여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포를 기록한 것은 아프리카의 Cape Verde란 작은 섬국가의 주민들이었다. 

전성기에 포경업자들은 외항선에서 낭만적인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로 평판이 좋았다. 헐만 멜빌의 (1819-1891) 유명한 포경소설 ‘무비 딕(Moby Dick 1851)’은 “몇몇의 푸른 벨몬트 주민들과 뉴 햄프셔 주민들”이 19세기 중엽 “ 돈과 영광을 갈망하면서 매샤츄세츠 포경항구로 몰려들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은 낭만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859년 펜실바니아에서 오일이 터져 오르고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포경사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전쟁동안에는 10여개 이상의 포경선들이 포격에 침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래잡이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옛날 같은 재미를 볼 수 없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옛날같은 인기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뉴 벧포드에서는 1924년에 마지막 포경선이 출항하였다.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고래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현재 미국에서는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있으며, 고래잡이를 둘러싼 낭만적인 풍부한 문화적 전통들이 미국의 문학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고래의 뼈로 만든 예술품들은 Scrimshaw(조각세공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만드는 예술가들을 Scrimshande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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