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8(월)
젱어 재판과 (Zenger Trial) 언론의 자유  
<늘푸른나무/이야기 미국사/2019년 6월>

젱어 재판과 (Zenger Trial) 언론의 자유

언론자유라고 하면 미국을 떠올릴만큼 언론이 보장되어 있는 나라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져서 오늘이 있게된 것이다. 그 가운데는 누구보다도 식민지 시대에 뉴욕시에서 신문발행인으로 활동하였던 죤 피터 젱어(1697-1746)의 기여를 들 수 있다. 젱어는 1735년 자신을 상대로 제기된 명예훼손죄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 미국적인 언론자유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독일에서 출생한 젱어는 어린아이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왔다. 그는 부모에 의하여 유명한 인쇄인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거기에서 인쇄기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1933년 수습기간을 마친 후 젱어는 자신의 신문으로 NewYork Weekly Journal을 시작하였다. 

초창기 대부분의 미국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Journal은 공개적으로 당파적인 성향을 분명히 하였다. 젱어는 창간호에 당시 영국이 임명한 주지사 윌리암 코스비(1690-1736)를 비판하는 것이 신문의 공약임을 분명히 밝혔다. 

귀족출신의 코스비는 뉴욕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는데 젱어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지 않았다. 젱어가 특별히 코스비를 비판하는 글들을 싣자 코스비는 젱어의 체포를 명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면회 오는 아내를 통해 지시를 내리면서 10여 개월동안 계속해서 신문을 발행하였다.

재판에서 젱어는 당시 유명한 필라델피아의 변호사 앤드류 해밀톤(1676-1741)의 무료 변론을 받게되었다. 배심원들은 정부와 코스비가 지명한 법관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하밀톤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법 자체가 불공정하므로 법관들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젱어에게 무죄선고를 해야한다고 설득하였다.

재판이 끝날 무렵 젱어는 많은 뉴욕사람들의 지지를 받게되었고 그의 재판에 대한 기억은 50년 후 제1차 수정헌법을 통해 언론 자유를 보호하도록 고무하였다.

젱어는 1746년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아내 안나와 아들 쟌이 계속하여 신문을 발행하다가 1751년 폐간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젱어는 독일에서 출생하여 이민왔기 때문에 영어구사에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젱어가 쓴것으로 알려진 크로스비에 대한 비판들은 크로스비 지사의 정치적 맞수이며 젱어신문사의 재정적 지원자였던 제임스 알렉산더가 쓴 것으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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