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단편   ▒  

딸깍발이 -이 희 승-  

<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5년 9월>

딸깍발이 -이 희 승-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애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서툰 솜씨)이여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구식(三旬九食-한달에 9번 정도밖에 끼니를 때우지 못할 형편을 말한다)의 비참한 생활을 해가는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아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불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 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 수염이 뽀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 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니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갓 모자)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배중의 적삼이거나 복(伏) 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자라지고, 때가 꾀재재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한복 바지를 입을 때 거추장스러움을 박기 위해 무릎 아래 부분을 동여매는 물건)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본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구차하고 허름한 차림새)이나마 의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을 어름에 박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빛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의 곳미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개결(淸廉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와 염치가 있을 뿐이다. 인(仁)과 의(義)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와 숙제를 배울 것이요, 악비와 문천상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取貸)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 삼척 냉돌에 변변하지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대로 웅크리고 안감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마는 , 마음으로 안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지조, 이 몇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名人)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만든 것은 어줍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부류요, 삼학도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閔忠正)도 그다. 국호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 청의 응낙을 얻어야 했고 역서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의 혼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한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으로써 지존에게 직소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아친, 저녁)에 박도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봉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 기백의 구현인 것이 의심없다.

구한말 말엽에 단발령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를 올리어서 “이 목을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하기 짝이 없었지마는 죽음도 대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의 일, 코 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姑息之計-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일시적인 계책)에 현명하다. 염결(廉潔-청렴결백)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의 명수필 1, 을유문화사 간>

*이희승(李熙昇,1896-1989)-국어학자로 서울대학교 교수 역임. 호은 일석. 시인과 수필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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