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필론의 돼지>  

<웹진/늘푸른나무(www webegt.com/문화산책/이달의 단편/2015년 6월 1일>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


이문열(1948- )은 소설가로 대학교수를 역임하였다. 1990년대 이후 보수적 문인 겸 논객으로 진보계열 인사 및 페미니스트 인사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7년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1979년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고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이상문학상, 호암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는 원래 되도록 군용열차는 피하려고 했었다. 지난 삼 년의 병역생 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바깥 사회에 있을 적에 그도 가끔씩 자기들의 군대생활을 그리웁게 회상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복무기간중에 한 여러 개의 명서 중의 하나는, 나만은 제대해 나가더라도 결코 그런 쓸개빠진 짓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제 막 그 원한에 찬 생활을 끝맺고 귀향하는 마당에 또 그놈의 군용열차라니‥‥‥ 적어도 전날밤 그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사정은 밤새 달라지고 말았다. 친구들도 술잔깨나 사고 그 자 신도 미리 약간의 돈을 준비했었지만, 막상 서울을 떠나려고 보니 주머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흥청흥청 제대 기분을 낸 탓으로 만약 제값 치르고 일반열차를 탄다면 대구에서 고향까지 이백 리 길은 걷기 알맞게 되어 있엇다. 용산역으로, 현역때조차 기를 쓰고 피해 보려던 그 쓰라린 장소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은 우리 전 육군의 제대출발일이어서 그가 탄 군용열차에는 제대병을 위한 객차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객차 안도 복잡하지 않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는 습관대로 출입구에서 열번째쯤 되는 곳의 마침 비어 있는 좌석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객차 가운데에 앉는다는 것은 부담스런 일이었다.

왠지 어떤 상황의 가운데에 자리잡게 된 것 같은 느낌, 따라서 무언가 성가신 일에 부딪칠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작은 세면도구함을 열차시렁에 넣고 자세 편하게 앉으려 할 무렵, 비어 있던 앞 좌석에도 두 사람의 제대병이 자리를 잡았다.

"곱개(객차) 가운데 타문 마음이 안 놓이예. 사고라도 나문 빠져나오기 힘들꺼 아닙니꺼. 글타코(그렇다고) 입구에 앉으면 너무 분답고(복잡스럽고)‥‥‥ 이쯤이 딱 알맞지예."

서로 말을 올리는 것으로 보아 역광장의 대폿집이나 식당 같은 데서 만난 사이 같았다. 그는 무심히 떠들고 잇는 쪽을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흘긋 그를 건네본 상대편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아이코, 이게 누군교? 이형이구만예, 날 모르겠능교? 홍동덕(洪東德)이, 홍동덕이라예."

그러자 대뜸 '홍 똥덩이'가 떠오르고, 뒤이어 상대가 뚜렷이 기억돼왔다.

홍(洪)은 수용연대에서 만난 친구로 그와는 제2훈련소 입교동기였다. 거기다가 그 후로도 같은 중대 같은 소대에다 분대까지 함께였다. 그러나 그가 홍을 그토록 쉽게 기억해낼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그 예사롭지 않은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인연이 있는 여러 훈련소 동기중에서 유독 홍만을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게 한 것은 홍으로 보아서는 좀 민망스런 훈련소 시절의 추억 때문이었다.

경남 어느 두메산골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학력을 속여가며 입대한 홍은(그때도 이미 국졸 이하는 입대를 받지 않았다) 훈련기간 6주 동안 '군인의 길'은 물론 간단한 수하요령조차 못 외운 유일한 소대원이었다.

소총분해결합도 끝내 규정시간에 대지 못해 몸으로 때웠다. 홍이 끊임없이 분실한 수많은 보급품을 채우기 위해 분대장인 그가 겪은 고초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모든 소대원이 엄연히 '홍동덕'이란 이름이 있는데도 그를 '홍 똥덩이'로 불렀을까.

그 모든 걸 상기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고생이 심하셨지요?"

그러자 홍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실쭉해졌다. 아직도 나를 그런 식으로 보느냐는, 항의섞인 표정이었다.

"고생이사 뭐, 집 떠나면 다 한가지 아잉교. 나는 그래도 보직이 좋아 남카모는 잘 보냈구마. 이형은 어땠능교?"

"말마쇼. 나는 제대 일 주일 전까지 근무했어요."

그는 검열용 차트를 그리느라 철야하다시피한 일 주일 전과 애원 반 협박 반으로 그를 닦달하던 정훈참모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런, 그 흔한 제대말년도 몬찾고? 어데 있었는데?"

홍은 그보라는 듯 말투마저 반말로 나왔다.

"XX사단 정훈참모부요."

"말이 글타카데만(그렇다 하더니만)참말이구마. 육본이다, 무슨 사령부다 커는 번지리한 데가 속 골빙(골병)든다 카디."

사실 대졸 학력 때문에 사단사령부로 차출될 때만 해도 그는 약간 우쭐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았다. 형태나 방식이 다를 뿐, 모든 대한민국 젊은이가 그 삼 년간에 바쳐야 할 봉사의 양은 동일하다는 것을. 그 땀과 눈물과 피도. 사병이 편해 자빠져서는 도대체 유지되지 않는게 그 조직이었다.

"홍형은 어디 있었는데요?"

"내사 말단 소총중대지, 장파리(長坡里) 있었구마. 그래도 두 달 전부터 열외(列外)였제. 차라리 속닥한 데(조용하고 한쪽진 데)가 편트마."

그러자 그는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언젠가 전방 소총중대에 검열을 나갔다 만난 사병들의 그 지치고 짓눌린 표정이었다. 산촌에서 지게지기보다 나을는지는 모르지만, 홍처럼 번번히 편했던 것을 내세울만 한 곳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홍은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자기가 얼마나 편안한게 잘 지냈은가를 열심히 늘여놓기 시작했다.

"중대 보급계를 안 봤던가베. 먹는 거 입는 거 흔전만전이었구마.

닭고기 나오는 날 서너 마리 치아났다가(감춰뒀다), 식용유에 튀가(튀겨)놓으믄 그 맛 참 기찼제.."

하지만 중대보급계 정도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생판 무식인 홍에게 그런 보직이 주어질 리도 없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곳은 취사병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홍의 몸이 유난히 비대해지고 뭉툭한 손끝에 어딘가 기름과 그을음이 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보직 분류를 할때 나이가 많거나 학력이 낮아 별 쓸모가 없는 병력은 취사부로 돌려지게 마련이었다. 그는 홍의 경력을 어느 정도 정확히 알아낼 것 같았다. 그러나 홍은 더욱 열심히 뻔한 얘기를 계속하는 데 신명을 내고 있었다.

"선임하사도 내게는 꼼짝 몬했능기라. 쌀말이라도 얻어 갈라카믄 내 눈치를 바야 하잉까. 토요일 일요일은 산너머 주막에서 안 살았나. 쌀이고 라면이고 내 쓰는 건 언(어느) 놈도 '타치' 몬했능기라‥‥‥"

누구에게 들은 어느 시절 군대얘긴 줄 모르겠지만, 확실히 홍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감탄보다는 아아, 이 삼년이 순박한 농부 하나를 얼치기 건달로 바꾸어 놓았구나, 하는 느낌에 그는 왠지 쓸쓸해졌다.


홍은 이제 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맞장치는 옆자리의 제대병과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객차는 거의 차고, 얘기 소리로 시끄러웠다. 대개가 홍과 같이 그렇고 그런 얘기였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게 간사한 것일까. 추운 겨울밤 외곽동초를 서며, 혹은 군기의 명분 아래 인간적인 모멸을 당하면서, 혹은 별 이유도 없는 특수훈련(기합)으로 이를 악물던 때가 언제였던가. 십 년 전이던가, 이십 년 전이던가.

그는 약간 한심한 기분이 들어, 시끌덤벙한 주위를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청해볼 작정이었다. 어느새 출발한 기차는 한강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슴프레 잠이 들려던 그는 갑자기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게 난폭하고 독기어린 고함소리에 눈을 떴다.

"야이, 땅개(육군)새끼들아."

보니 검은 각반 두른 현역 하나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뒤이어 다른 검은 각반 하나가 나타나 그를 말렸다.

"아서, 여기는 제대병 형님들이다."

하지만 과히 말리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빙글거리며 좌중을 돌아보는 폼이 차내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차중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제대 좋아하네. 왕년에 제대 한번 안해본 놈 어딨어? 이 새끼들한테도 거둬들여."

그러자 상대가 다시 한번 능을 친다.

"어이, 임 하사. 한번 봐주라. 삼 년 시집살이 이제 눈물 씻고 콧물 닦고 돌아가는 길이야."

"안돼, 새꺄. 그러니까 더 거둬. 어떤 놈은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맞고도 아직 13개월이 창창한데, 어떤 놈은 말랑말랑 엉덩이로 비실대다가 제집으로 기어들어? 어이----."

그는 다시 출입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통로 쪽에다 손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대여섯 명의 검은 각반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말리던 상대는 못이긴 척 히죽이 웃으며 돌아서더니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형님들 미안합니다. 고생하는 후배를 위로하는 셈치고 동전 한푼씩이라도 술값 좀 보내 주십시오. 절대로 공짜는 받지는 않겠습니다‥‥‥"

익숙한 솜씨로 제법 유창한 연설이었다. 뒤이어 그는 새로 들어온 검은 각반 하나를 앞세우며 거창하게 소개했다.

"저희 부대의 자랑, 왕년의 가수 나XX군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그러자 지난 삼년 휴가 때마다 당해온 나머지일까, 몇 군데서 어정쩡한 박수소리가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사회자는 다시 방금 소개한 앳된 검은 각반에게 말했다.

"어이 나XX, 한곡 불러."

시정 나XX라고 불리운 검은 각반은 그러나 노래도 얼굴도 진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곧 째지는 듯한 노래소리가 차간을 메웠다. 그사이 나머지 서넛은 갯석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곧 딸랑딸랑 동전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정말 사람 거지취급할 거야?"

갑자기 노래소리가 중단되면서 욕설이 들려왔다. 뒤이어 무어라고 우물우물하는 소리, 철썩, 퍽 하는 소리, 그가 소리나는 쪽을 보니 대여섯칸 앞에 제대병 하나가 당하고 있었다.

"옛다. 동전 두개. 네 애인 XX에나 넣어줘라, 이 새꺄. 술이 고파 죽어도 고린내 나는 네놈 돈은 싫다. 임마."

잠시 객차 한켠이 수런거리는 것 같았으나 검은 각반들의 매서운 눈길이 두어 번 보내지자 이내 조용해졌다. 처음부터 그들의 출현이 못마땅하던 그의 가슴에 은은한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제 그 모든 불합리와 폭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헌병이나 열차 공안원이 와서 그들을 제지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헌병이나 공안원의 특징은 필요없을 때만 나타나는 점이다. 노래는 다시 계속되고 징수는 계속되었다.

"이노무 차에는 헌병도 없나? 만날 이꼴이고."

옆좌석 홍이 마치 그의 기분에 맞장구라도 치듯 투덜거렸다. 그는 갑자기 홍이 밉살스러웠다. 몇 명의 난폭자에게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는 백여 명의 동료들에 대한 혐오감이 갑작스레 홍에 다한 증오로 변해버린 것일까. 그러나 이내 그 증오는 다시 자기혐오로 되돌아왔다. 아, 나의 팔은 너무 가늘고 희구나, 내 목소리는 너무 약하고, 내 심장은 너무 여리구나, 저들의 폭력을 감당하기에는. 학대받고 복종하는 데 익숙한 내 동료들을 분기시키기에는.

그사이 징수인들은 그의 의자 두어 칸 앞에까지 다가왔다. 무력감과 자기혐오에 지친 그는 거의 참담한 심경으로 주머니 속의 백원짜리 주화 한 닢을 만지작거렸다. 홍도 주머니에 손을 찔고 있는 폼이 백동전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돌연 바로 앞줄에서 거친 얼굴에 건장한 제대병 하나가 일어났다.

"씨팔, 보자보자하니 정말 더러워서 못봐주겠네."

돈을 거두던 검은 각반들이 험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엇쭈, 넌 뭐야?"

"시꺼, 임마. 너 같은 건 들어도 몰라. 저 문앞에 기대 서 있는 치, 너희 선임자야?"

완전히 상대를 안중에도 안 두는 태도였다.

"어? 이새끼 봐라."

검은 각반 하나가 잽寬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제대병이 무얼 어떻게 했는지, 주먹의 주인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 기세에, 힘을 얻은 제대병 몇이 여기저기서 가세하고 일어났다. 그러자 무더기로 덮칠 기세이던 검은 각반들도 주춤했다.

"뭐야, 뭐야?"

그때껏 입구에서 취한 체 비틀거리던 검은 각반 하사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끼어들었다.

"너는 하사니 좀 알겠군. 백골섬 들어봤어? 나 거기서 집에 간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사는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기죽을 수는 없다는 듯 애써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 만하면서 왜 그래? 냄새나는 땅개새끼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우리 같이 한잔하지."

그는 간절한 기대의 눈길로 이 갑작스럽게 출현한 영웅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영웅은 뜻아니한 검은 각반의 제안에 잠시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에는 계산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때? 같이 가지."

다시 한번 검은 각반 하사가 종용했다. 차내의 눈길은 모두 올바른 계산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 용감한 동료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괜찮지, 술 있으면 한잔 줘."

그리고는 검은 각반 하사와 함께 입구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제대병이 준 배신감은 그를 한층 참담한 기분에 젖게 했다. 동조해 일어섰던 몇몇도 무너지듯 제자리에 낮았다.

드디어 그에게도 차례가 왔다.

"이 친구, 왜 이리 벌레씹은 얼굴이야?"

그들도 눈은 있다는 듯 백원짜리 주화를 벌린 모자 속에 던져넣는 그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는 정말로 벌레를 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그드리 이죽거림으로 인해 더 격렬해졌다.

(아아, 기어코‥‥‥)

"몸이 아푸구만예, 나 뚜소."

갑자기 홍이 끼어 들었다. 그의 분노로 창백한 얼굴을 그렇게 본 것이었을까. 그들도 홍의 말을 듣고는 더이상 시비 않고 다음 좌석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저 좋은기, 좋은기다. 절마들(저놈들) 사람도 아이구마. 속상하겠지만 참으소."

홍은 결코 그가 몸이 아픈 것이라고 오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그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정말 3년동안 더러운 것만 배웠군‥‥‥"

그는 거의 자신을 걷잡지 못한채 내쏘고 말았다. 홍은 피식 웃었다.

"깨끗한 거 배운 사람도 별수 없더마. 이형이 낸거나 내가 바친거나 다같이 백원짜리 동전잉께. 너무 그러들 마소."

그리고 한없이 너그러운 소리를 덧붙였다.

"쏘주나 한잔하고 마음 푸소. 어이----- 여기 소주 힌빙(병)"

마침 판매원이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걸 보고 홍이 호기롭게 불러세웠다.

"혼자 들어요"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억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홍에게 화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은 그런 그의 속을 한번 더 뒤집었다.

"지는 못 먹는 술을 남 사준다카몬 그거야 참말로 벨 꼴리는 일이제.홧김에 서방질이락꼬. 한잔만 하소."

기어이 그는 고함을 꽥 지르고 말았다.

"그만해."

그의 새파랗게 날선 표정을 보자 홍도 약간 움찔했다. 홍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더니 계에 앉은 제대병에게로 술잔을 돌렸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이 올리 없지만 그렇게라도 이 굴욕의 시간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귀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아이구 형님 고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느 쓸개빠진 제대병이 마음먹고 상납을 한 듯 검은 각반 하나가 과장스레 외쳤다.

"어이, 여기 이 형님한테 술 한자. 아우들을 위해 센다이(천원)를 내셨다‥‥‥"

그 무슨 이해못할 변화일까. 한번 그런 일이 있자 무슨 전염처럼 그 부근에서 두어 번 그런 소동이 더 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동안 순조롭던 징수에 다시 제동을 걸렸다. 객차 한가운데쯤에서였다.

"야, 너 정말 째째하게 굴 거야? 백원짜리 동전 한 개가 그렇게도 아까와?"

검은 각반의 거친 고함.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오."

아멸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그는 원인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깡마른 제대병 하나가 검은 각반들과 꼿꼿이 맞서 있었다.

"이 새끼, 노래는 공으로 들으려는 수작이군."

"그 노래 도대체 누가 청했소? 내게는 안면 방해밖에 안됐소."

"개새끼, 문자쓰고 있네."

갑자기 곁에 있는 검은 각반 하나가 주먹을 날렸다. 깡마른 제대병은 한번 휘청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맞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풀자 코피가 터진 듯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다. 그러는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거렸다. 목소리도 더 카랑카랑했다.

"당신, 사람을 쳤소. 더구나 나는 아직 전역신고를 안 했으니 현역병장이요. 그런데 당신은 일병이오. 하극상이야. 내 반드시 군법회의에 당신을 걸겠소."

그때 어느새 왔는지 검은 각반 하사의 주먹이 다시 그의 복부를 쳤다.

"나는 하사니까 쳐도 되겠군. 염(殮)하다 놓친것 같은 새끼야, 입닥치고 돈이나 내. 이것도 명령이야."

잠시 복부의 타격으로 몸을 접었던 깡마른 제대병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소. 거기다 당신은 내게 명령권도 없소. 이건 폭행이오. 당신도 고발하겠소."

"지미랄, 이 새끼는 판사 검사를 에미애비로 태어났나? 아나, 법 여기있다."

다시 날아드는 주먹. 그러나 조금의 간격 후에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대꾸했다.

"법은 당신들을 반드시 찾아갈 것이오."

하지만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뒤이어 날아든 주먹과 발길질에 그 깡마른 제대병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한결 암담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입구 쪽을 주시했다. 헌병이나 공안원이 나타나기를 구세주처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법과 진리처럼 멀었다.

대신 그 출입구를 통해 나타난 것은 뜻밖의 현실이었다. 조금 전에 그들을 배신하고 떠났던 영웅이 비참한 몰골로 두 명의 검은 각반에게 끌려 들어왔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어 있었다. 그를 팽개치듯 자리에 처박은 검은 각반 하나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쥐뿔도 없는 새끼가 뚝심만 믿구 까불어."

그리고 몰락한 영웅을 소리나게 한번 걷어차고는 훌쩍 가버렸다.

그 돌연한 사태는 언제부터인가 희미하게 술렁거리던 차안을 다시 잠잠하게 만들어 버렸다. 깡마른 제대병이 일어설 때부터 웅얼거림처럼 들리던 탄식과 불평은 그 제대병이 쓰러질 때쯤 해서는 제법 구체적인 반항의 표현으로까지 번졌었다.

그는 착잡하고 음울한 심정으로 다시 계속되는 징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떤 형태로든 집단을 이루기만 하면 끝까지 나약하게 죽어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검은 각반들이 깡마른 제대병을 주저앉히고 채 두 줄도 전진하기 전에 갑자기 반대편 구석에서 흥분에 찬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차안을 흔들었다.

"야, 이 답답한 친구들아, 삼 년간 당한 것도 분한데 끝나는 오늘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여!"

모두들 꿈에서 깨난 듯 움찔했다. 절규와 같은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그들 마음 속의 희미한 불씨에 세찬 부채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웬 놈이야?"

"어떤 새끼야? 죽고 싶어?"

검은 각반들의 반응도 그때쯤은 거의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은 얼굴을 숨긴 채 선동만 계속했다.

"우리는 백 명이란 말여. 그런데 다섯 명한테 당해서야 쓰겄어?"

그리고 두리번거리던 검은 각반들을 무시한 채 목소리는 계속됐다.

"부랄들 떼 던짓뿌란 말여. 집에 가서 이 얘기를 어떻게 할 거여? 애인보고는 뭐라고 할 거여?"

드디어 검은 각반들은 소리나는 곳을 잡은 듯 그쪽으로 덮칠 자세였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너무나 사태의 변화에 둔감했다. 그들이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성난 부르짖음이 튀어나왔다.

"맞아, 끝까지 당할 수는 없다."

"저놈들도 피와 살로 된 인간이야, 혼자서 안되면 셋이, 셋이 안되면 열 명이 붙지."

차츰 목소리들이 불어났다. 특히 아직 징수를 당하지 않은 쪽의 호응이 컸다. 이미 빼앗긴 자의 분노보다 아직 빼앗기지 않은 자의 지키려는 의지가 더 무서운 것일까.

"저놈들 몇 놈 죽여버린들 우리 백 명 모두 잡아죽일 거여? 기껏해야 몇 달씩 집에 늦게 가면 되여."

다시 처음의 그 목소리. 그러자 이에 호응하는 목소리들도 점차 격렬해졌다.

"맞다, 죽여. 때려 죽여."

"문 막아. 못 토끼게."

여기저기서 제대병들이 일어서고 몇몇은 정말로 양쪽 출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검은 각반들은 처음 그 갑작스런 변화에 얼떨떨한 눈치였다. 그리하여 절대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왁살스런 여러 개의 손이 그 중 하나의 어깨를 끌어올렸다.

그 불행한 검은 각반은 거의 손 한번 써볼 틈도 없이, 마치 무슨 가벼운 공기돌처럼 수십 개의 손바닥에 받쳐져서 의자 몇 줄을 건넌 후, 바로 그의 옆 통로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위를 수십 개의 제대화발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역시 검은 각반은 검은 각반이었다. 수많은 특수훈련과 거친 생활에 단련된 그들은 그 아연한 사태를 당해서도 재빠르게 대처했다.

남은 넷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소주병을 깨뜨려서 휘들러 생긴 틈으로 다른 하나가 열차 창문을 구둣발로 박살내고, 이어 나머지가 칼처럼 생긴 그 유리조각으로 무장을 했다.

그리고 등을 맞대 원진을 친 그들은 성난 물결 같은 제대병들 속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살기를 띤 채 흉기를 휘두르며 활로를 개척해 나가는 그들에게는 기세등등하던 제대병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욕설과 고함 속에서도 조금씩 틔어주는 길로 검은 각반들은 조금씩 헤쳐 나갔다.

약간은 후련해 하면서도, 여전히 전권(戰圈) 밖에서 그 소동을 지켜보던 그는 왠지 이번에는 허전한 마음이 되어 그런 검은 각반들의 탈주를 바라보았다. 전권은 점점 그의 좌석 부근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참말로 와이래 쌌는지 모르겠구마. 가겠다믄 보내주고 말끼지."

지금껏 잊고 있었던 홍이 불쑥 말했다. 술은 약한 듯 소주병이 반밖에 비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불그레하게 익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부근에서 그 소동에 말려들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와 홍뿐이었다. 그는 약간 기이한 느낌으로 홍을 쳐다보았다. 졸리운 돼지 같았다.

그런데 다시 갑작스런 사태와 변화가 그의 주의를 홍에게서 돌리게 하고 말았다. 검은 각반들이 거의 그의 앞 서너 발자국 앞에까지 접근해 왔을 때였다. 웃통을 벗어부친 제대병 하나가 의자 등받이를 타넘고 달려와 검은 각반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못가, 이 나쁜 놈들. 너희 멋대로야. 갈 테면 나를 찌르고 가. 마침나가 보아야 별 볼일 없는 몸이야."

다시 검은 각반들의 얼굴에 아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멈칫 전진을 중단했다.

"어디 찔러봐. 괴로운 세상 여기서 끝내는 것도 좋고, 통합병원에서 몇 달 쉬는 것도 괜찮아."

상대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했다는 투였다. 그런 그의 알몸에는 여기 저기 흉칙한 자상이 불빛 아래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검은 각반 중 하나가 질린 듯 멍청하게 물었다.

"그럼, 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손에 든 걸 버려. 그리고 꿇어 앉아 여러 형님들에게 빌어."

그러나 무기를 잃은 순간이 바로 마지막이란 것을 검은 각반들도 직감하고 있었다.

"비켜, 죽여버린다."

성마른 검은 각반 하나가 유리칼을 휘둘렀다. 벌거벗은 제대병의 팔 어름에 한줄기 피가 솟았다. 그러나 벌거벗은 제대병은 여전히 산악처럼 버티고 선 채 자기 배를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여기야, 여길 찔러. 그래야 죽든지, 몇 개월이라도 편히 누워 지낼 수 있지. 그 따위 유리조각이 겁난다면 4밑두의 아이구찌가 아니야."

마치 불사의 악귀 같았다.

"에잇, 죽어."

다시 검은 각반 하나가 표독스런 기합과 함께 유리칼을 휘둘렀다. 벌거벗은 제대병은 날쌔게 피했지만 가슴어림에 꽤 깊은 긴 상처가 났다. 여러 줄기의 피가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끔찍한 광경이 다시 한 계기가 됐다. 지금껏 물러서고만 있던 제대병들이 갑작스레 공세로 전환했다.

'죽어, 죽여버려' 하는 성난 외침과 함께 먼저 의자의 시트가 검은 각반들의 시야를 덮고, 뒤이어 손가방이며 세면도구함이 그들의 정신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그 뒤를 수십 개의 손과 발이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각반 넷 중에 서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사이 셋은 각각 끌려가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을 내고 있었다.

홀로 남은 검은 각반도 사태가 절망적인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얼굴에 본능적인 죽음의 공포가 어렸다. 그 검은 각반은 갑자기 들고 있던 유리조각을 떨어뜨리고 정말로 꿇어 앉아 빌기 시작했다.

"형님들 살려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한번만‥‥‥"

그러나 말을 맺을 새도 없이 사방에서 발길과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 검은 각반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꼬꾸라졌다.

마침 그 검은 각반이 쓰러진 곳은 그의 두어 발짝 앞 통로여서 그는 아무 행동도 않으면서도 저절로 전권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거의 망연한 기분으로 이제는 잔인한 린치로 변한 그 광경을 살펴보았다.

순한 양처럼 당하고만 있던 제대병들 어디에 그런 광포함과 잔혹성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제대병들은 검은 각반이 일어나면 주먹으로 치고 쓰러지면 짓밟았다. 개중에 어떤 친구는 담배불로 지지기까지 했다. 그럴때마다 검은 각반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둔중한 신음과 함께 그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객차 안 곳곳에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네 명의 운명도 그 검은 각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고만 합시다. 진정들 해요."

누군가가 이성을 회복한 듯 동료 제대병들을 만류하려 들었다. 그러나 곧 여럿의 흥분하고 성난 목소리가 그런 호소를 삼켜버렸다.

"당신은 속도 없어? 당한 게 분하지도 않아?"

"이런 악종들은 아예 씨를 말려야 해."

제대병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그들을 보며 그는 문득 섬뜩한 상상에 빠졌다. 만약 이 검은 각반들이 죽는다면?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大義)가 잇다면, 그에게도 동료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앙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어떻게든 이들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무참히 묵살당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동료들이 부상당하고 피해를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분기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불필요하게 난폭하고 잔인해진 것 또한 만류할 능력은 그에게 없었다.

그러다가 기껏 그가 생각한 것은 대의 없는 이 소동의 와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날뛰는 동료들 사이를 조심스레 헤쳐 그 객차를 빠져나왔다. 법과 진리의 도착은 언제나 늦었다. 그가 막 다음 객차의 빈자리를 찾아 앉을 때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한떼의 헌병과 함께 호송병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막연한 우울 속에서,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그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홍이었다. 어느 새 빠져나왔는지 홍은 그의 등 뒤를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잘 나왔구마. 내 나올때 이형도 데불고 나올라카다가 또 성내까봐‥‥‥"

그는 처음 송연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원인모를 슬픔과 절망으로 축 처져 내렸다.

"나는 당최 시끄러운 게 싫어서---- 자, 쏘주나 한잔 하소."

홍은 먹다 남은 소주를 의자 등받이 위로 넘겼다. 그는 맥없이 소주병을 받았다. 그러나 졸음으로 가물거리는 홍과는 달라, 화끈거리는 소주를 병째 부어넣으면서 그래도 그가 이런 일화를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논 팔고 밭 팔아 그를 대학에까지 보내준 고향의 늙은 부모덕택이었다.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賢者)인 자리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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