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단편   ▒  

내가 본 싼타크로스-  

<늘푸른나무/이달의 단편/2009년 12월>

내가 본 싼타크로스

1961년 12월 23일 오후 6시, 뉴욕 발 로스앤젤스 행 비행기 안.

나는 나의 집이 있는 호놀루루로 가기 위하여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나는 깊은생각에 잠겨 있었다. 집에 도착하여 동네 꼬마들에게 들려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서였다. 동네 아이들이 올해 크리스마스엔 <싼타틀로스 할아버지는 정말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달라고 나에게 미리 숙제를 주었던 것이다. 매사에 의심과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좀처럼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호노루루에 도착하려면 접속비행기를 타야 한다. 정시에 비행기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수 있을까? 기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스피커를 통해 조종사가 언짢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로스앤젤리스 비행장에 낀 짙은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착육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스앤젤리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비상용 비행장에 내리겠노라고 조종사는 말했다.

12월 24일 오전 3시 12분. 설상가상으로 여러 가지 사고가 겹쳐 우리는 정시에서 6시간이나 지난 시각에야 온타리오 비상용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허기,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피로감으로 우리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접속 비행기는 떠난 지 이미 오래였고 덕분에 우리는 다같이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꾸미는 일 따위 같은 것은 나는 이제 염두에도 없었다.

오전 7시 15분, 로스앤젤스 비행장. 지난 4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이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 듯싶다.

1 천 여명이 넘는 승객들이 내린 온타리오 비상용 비행장은 마치 아수라장과도 같았다. 수십 대의 로스앤젤리스 행 비행기가 속속 그 비행장에 내렸던 것이다. 승객들이 이 뜻하지 않은 사고를 한시 빨리 집에 알리려고 했다. 걱정 속에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신국의 문이 굳게 잠겨 있었으므로 공중전화통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쳤다. 먹을 것도, 속을 녹여 줄 커피도 구할 수가 없었다.

조그만 비행장의 직원들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 난감한 사태를 당하여 노한 승객들 못지않게 흥분하고 지쳐 있었다. 무엇 하나 바로 도는 일이 없었다. 짐짝들은 행선지 같은 것은 아랑곳 없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어는 누구도 버스 노선과 발차시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애들은 울부짖고 여자들은 종종 걸음치며 쉴새 없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사람들은 놀란 개미떼처럼 우왕좌왕 서로 밀치고 부딪치고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 누구나 기다려온 크리스마스 전날의 광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순간 나는 어디선가 들려 오는 자신만만하고 침착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맑고 잔잔했으며 마치 사람으로 가득 찬 커다란 교회의 종소리와도 같았다.

“자, 부인 걱정 마세요. 부인의 짐을 찾아서 때 맞춰 라 졸라로 보내 드릴 테니까요. 자아, 모든 것이 다 잘 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혼란이 시작된 후 정말 처음으로 들어보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나는 얼굴을 돌려 이 말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의 모습은 우리가 북새통에서 잠깐 잊었던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되살려내는 그런 것이었다. 작은 키에 배가 불룩 튀어나온 뚱뚱보, 형색이 좋은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관광안내역들이 쓰는 정모 비슷한 것이 얹혀 있었다. 모자 밑으로 흰 고수머리가 부드럽게 물결 쳐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눈 벌판을 달려온 사람처럼 사냥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사람 옆에는 손수 만든듯한 손수레가 있었는데 그 안에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커피 주전자와 갖가지 모양의 종이상자가 쌓여 있었다.

“자 부인, 내가 부인의 짐을 찾아올 동안 여기서 커피를 들도 계십시오.” 그는 커피를 따라 여자에게 권하면서 말했다.

그는 손수레를 끌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갔다. “크리스마스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연신 얼굴을 찡그리고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그는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산처럼 쌓여 있는 짐 더미로 가서 짐을 찾아 싣고는 다시 여자에게로 되돌아왔다. “나를 따라 오세요. 라 졸라로 가는 버스에 태워 드릴 테니까요.”

그 여자를 안내하고 난 뒤 그는 다시 대합실로 돌아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그의 조수가 되어 그를 따라다니며 승객들에게 그 손수레 위의 커피를 따라 주고 있었다. 내가 탈 버스는 한 시간 뒤에 떠날 예정이었다.

그는 이 우울한 비행장을 밝히는 한줄기의 빛이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짖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커피를 주면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의 코를 씻어 주기도 하고 , 크리스마스 노래들을 이것 저것 듣기 좋은 바리톤으로 흥얼거리기도 하며 당황해 하는 승객들을 안심시켰고, 또 갈 곳을 안내하였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기절하여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는 어쩌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레 위에서 약을 꺼내 여자의 머리를 떠받혀 먹여 준 다음 담요를 꼭꼭 눌러 덮어주었다. 얼마 후 여자가 의식을 회복하자 편안한 의자에 여자를 앉히고 나서 확성기를 통하여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일을 척척 해내는 이 우수꽝스럽고 자그마한 배불뜨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경탄의 자문을 해보았다.

‘무슨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가요?” 마침내 나는 호기심을 참을 일 없어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저 푸른 외투를 입은 어린이가 보이지요? 아마 보호자를 잃은 것 같소. 이 사탕을 주고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서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요. 만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간 정말 영영 어머니를 못 찾고 말게 될 거에요”

나는 그의 지시대로 하고 나서 또다시 “무슨 회사 직원이시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 회사 소속도 아니오. 나는 그냥 내 멋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오. 매년 12월이 오면 내가 얻은 두 주간의 휴가를 여행하는 이들을 도우며 보내 왔다오 이 바쁜 계절이 되면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지요. 아하, 저기 또 무슨 일이 벌어졌나 보군, 빨리 가봐야겠는걸.”

저만치 보채는 어린아이 딋 바라지에 그만 지쳐 떨어진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모자를 삐뚜름히 멋을 내 고쳐 쓴 다음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손수레를 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가방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다.

“아 부인, 아주 예쁜 아이로군요. 그런데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요?”

젊은 여자는 흐느껴 울면서, 남편과 1년 동안이나 헤어져 살게 된 사연을 말하고, 그 남편과 샌디아고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시간에 대어 닿지 못하게 되었으니 남편이 얼마나 걱정하겠느냐고 말했다. 더구나 아기가 배가 고파 울며 보채는 모양을 못 보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수레에서 따뜻한 우유 한 병을 꺼내 들고 “자, 이제는 아무 걱정 마세요. 모든 일이 잘 될 테니까요” 하고 여자를 위로하였다.

그느 여자를 데리고 로스안젤리스 행 버스-배로 내가 타야할 버스-를 찾아 나섰다. 그는 여자에게 물어 그녀의 남편 이름과 샌디아고 호텔 이름을 종이조각에 적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도착시간을 전해 주겠노라고 말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여인은 이제 쌔근쌔근 잠자는 아기를 안고 버스에 오르면서 그에게 말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시기를 빌며 훌륭한 선물도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그는 수줍음 타는 소년처럼 모자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벌써 가장 훌륭한 선물을 받았는걸요. 부인에게서 말이에요, 허허”

그때 그는 또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 있는 곳에서 무엇인가 흥미를 끄는 광경을 본 모양이었다.

“저기 저 노인네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군요.자 나는 얼른 저리로 가야겠습니다. 또 선물을 받아야 될 테니까요.” 그의 뒤를 따라 나도 버스를 내렸다. 아직 발차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젊은이가 내 조수 노릇을 잘한 상으로 내가 선물을 하나 줄 테요. 당신은 이제부터 저 여자 곁에 앉아 여자와 아기를 잘 보살펴 주시오. 로스안젤리스에 도착하면 (그는 종이 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샌디아고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 여자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늦게 된 이유를 알려주시오.”

내가 그의 말에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마치 대답 같은 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가버렸다.

나는 버스로 돌아와 그 여인의 옆자리로 가 아기를 안았다. 차창 밖으로 저만치 붉은 스웨터의 그 뚱뚱보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는 곧 떠났다. 나는 그 여자의 옆자리에 아기를 안고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흐뭇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그제야 머리 속에 다시 식구들과 크리스마스 생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이제 동네 꼬마들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정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관해서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 나는 산타클로스를 만나 보았던 것이다.

오천석 편 <노란 손수건(샘터사 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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