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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김 승 옥  

<늘푸른나무/이달의 단편/2008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김 승 옥

작가의 말 이 글을 쓴 지는 참 오래되었다. 1960년대 중반경 어느 해, 여성 월간지 <여원>의 원고 청탁서를 받고 쓴 콩트이다. 당시는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아무리 풍요를 구가하는 경제 선진국에서조차 20세 전후의 젊은이란 가난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6.25전후의 가난에 쪼들려 지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호주머니란 그 형편이 말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이만의 특권인 데이트를 안 할 수도 없다. 평소의 데이트는 호젓한 공원길이나 걸으며 비용 들이지 않고 때울 수 있지만 선물을 주고 받아야 하는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이란 참으로 암담한 날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은 법.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호주머니는 다만 바람만 드나드는 허공일 때, 아무리 싱싱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이그러지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이 콩트의 줄거리는 어디까지나 허구이지만, 그 분위기나 심리는 나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시절

거리엔 불빛이 드물었다. 남쪽 소도시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오로지 교회 안에 있을 뿐이었다. 아니 새벽이 되면 교회 안에 있던 크리스마스 이브는 찬바람이 씽씽 불어 대는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신자들의 집 마당에서 뜨거운 떡국 대접을 받기도 하고 비 기독교인들의 집 앞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를 불러 줌으로써 새벽잠에 빠져있던 그 집 식구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초저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용하고 추울 뿐이었다.

중학생 하나가 겨드랑이에 찬송가와 성경을 끼고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불빛이 드문 거리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별들이 추운 듯이 떨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앙상한 가로수들은 어깨를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중학생의 바지 호주머니 속에 든 손이 쉬임 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책을 사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여 가난한 자기 어머니에게서 겨우겨우 얻어낸 돈을 꼭 쥐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중학생은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비교적 불빛 밝은 번화한 거리에 들어섰을 때 중학생은 모든 교회들이 울리는 초종소리를 들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문득 한꺼번에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들은 이제 크리스마스 이브가 시작된다는 것을 좁은 골목 속에까지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중학생의 가슴은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조해진 마음과는 반대로 중학생의 걸음은 우체국 앞에 서 있는 해묵은 느티나무 아래에 멈추었다. 그곳에 서서 바라보면 그 도시에서는 가장 화려한 강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중학생은 시꺼멓게 잠들어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서서 눈앞에 늘어선 밝은 상점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봐, 중학생. 귀엽게 생긴 얼굴이 왜 새빨갛지? 추위 때문인가? 또는 지금 그대의 가슴을 급하게 뛰게 하는 그 어떤 생각 때문인가? 교회에 가는 길인 모양인데 왜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불 밝은 상점들을 둘러보고 있는가?

중학생은 지금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액수의 돈으로 무얼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 돈으로써 살 수 있는 물건 중에서 어떤 물건이 그 여학생의 마음에 들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학생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는 중학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여학생이 한 사람 있었다. 동굴동굴하고 날씨가 추워지면 양쪽 볼만 유난히 빨개지는 얼굴의 여학생이었다.
항상 초록색 반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를 볼 때도 여자들 쪽 줄에서 그 여학생을 찾아 내기는 쉬웠다. 중학생은 남들이 기도할 때도 눈을 뜨고 그 여학생만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 여학생과 말을 해보지도 못했고 다섯 발짝 안으로 그 여학생 가까이 가 본 적도 없었다. 그 여학생과 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까지 가까이 다가가 본 것도, 그 전날 밤 꿈속에서 그 여학생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이마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사실 그런지 아닌지를 보기 위해서 큰 용기를 냈었던 것이다. 검은 점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학생회의 크리스마스 예배가 끝난 뒤에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여흥이 있는 것이었다. 여흥 중에는 선물 교환이 있을 예정이었다. 선물 교환이란 각자가 선물을 한 가지씩 준비하여 거기에 자기 이름과 재미있는 사연을 적은 쪽지를 써서 제출하면 사회자가 모아진 선물 꾸러미들을 뒤섞어 놓고 한 사람씩 차례로 선물을 집게 하여 그 자리에서 펴 보기로 돼 있는 게임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그 선물이 간다고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생은 굳게 믿고 있었다. 자기의 선물은 반드시 그 여학생이 집어 들 것이라고. 그 믿음을 중학생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학생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이 자기의 선물을 펴 보았을 때, ‘이건 하나님이 이 선물을 준 사람과 인연을 맺으라는 계시다’고 생각하기를, 적어도 중학생은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오늘 밤 이후로는 반드시 그 여학생과 자기를 결부시켜 얘기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중학생의 가슴은 선물 게임이 있다는 광고를 들은 이후의 며칠 동안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상점들을 둘러보며 서 있던 중학생은 문득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가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사실은 중학생에게는 아주 작은 돈은 아니었다. 노트를 열 권쯤, 얇은 참고서라면 한 권쯤 살 수 있을만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중학생의 욕심은 엄청나게도 초록색 코트에 알맞은 목도리나 아니면 벙어리장갑이나 아니면 유리상자 속에 든 인형을 그 여학생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느티나무 밑의 어둠 속에 서서 중학생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진 돈이 실제 이상으로 초라해 보였고 동시에 자기의 무력함이 그의 작은 가슴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이제 예배가 시작된다는 교회의 종소리들이 도시의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중학생은 겨우 그럴듯한 생각을 해 냈다. 그것은 자기가 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외면하기만 하면 지금 자기가 빠져 있는 이 절망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이후로는 그 여학생을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교회에도 안 나가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중학생은 느티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갔다. 그리고 아까 자기가 바쁘게 걸어오던 길을 느릿느릿 돌아갔다.

대학생 시절

4시, k는 학교 앞 다방에 들어선다. 여기서도 오늘 밤에 무슨 파티 같은 게 있나 보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제법 요란하게 만들어 놓았다.

“티켓 안 사시겠어요? 오늘 밤에 올나잇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어요.”

낮익은 레지가 디켓 상자를 들고 와서 다방을 들어서는 K에게 말한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티켓이 수북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학교 앞 다방 따위에서 밤을 새우고 싶어하는 바보가 어디 있담. ?

“그거 저리 좀 비켜. 난 지금 오늘 저녁 데이트 자금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단 말이야.”

말하면서 K는 혹시 돈을 꾸어줄 만한 녀석이 없나 하고 다방 안을 둘러 본다. 스토브 가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패거리들 중에서 P란 녀석을 발견하자 K는 반가워 진다. 마악 그쪽으로 향하는데 P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하고 역시 수상한 반가움을 얼굴에 나타내며 의자에서 일어나 K를 향해 다가오는 게 아닌가.

4시 10분, K는 버스 정거장을 향하여 뛰다시피 걷는다. 호주머니에 쇠 푼이라도 가진 놈들이라면 학교 앞 다방에서 스토브를 둘러싸고 앉아서 한담이나 하고 있을 턱이 없지. 5시에 여자와 만나기로 한 약속만 없다면 사실 K도 학교 앞 다방에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명색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걸 지냈으면 싶다. 그렇지만 더 흥청대는 파티에 어떤 근사한 녀석의 파트너로서 참석할 수도 있을 여자를 과분하지만 애인으로서 모시고 있는 K는, 하늘이 두 조각 나는 일이 있을지언정 오늘 밤에 그 여자와 함께 지낼 비용을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녁밥값이 적어도 2백 원, 티켓 한 장씩만 사면 밤새도록 파묻혀 있어도 나무랄 사람 없는 뮤직 홀의 입장료가 오늘 저녁만 특별요금 일 인당 2백 원씩이니 여자 몫까지 4백 원, 내일 아침 교통비까지 하면 이럭저럭 천 원쯤 있어야 한다. 그런데 4시 10분 현재로 K의 주머니에는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애원하다시피 빈 백 원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버스 비 5원이 달아 난다.

“지금 몇 분쯤 됐습니까?”

혼잡한 버스 속에서 K는 옆 사람에게 묻는다. 이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S의 집이다.

“4시 25분입니다.”

“아니 벌써 . . .”

K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옛날 중학생 시절의 어는 크리스마스의 이브에 느티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문득 빠져 본 적이 있는 이래 수없이 그의 가슴을 두드리던 바로 저 절망감이라는 이름의 느낌이 또 K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S가 집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 아니 틀림없이 있을 거야. 녀석의 집 이층은 넓은 홀처럼 되어 있으니까 틀림없이 S는 자기 친구들과 그들의 파트너들을 초대한 파티를 오늘 밤 거기서 벌일 거야. 그렇다면 집에서 나갔을 리가 없지.

4시 30분.

“어머, 왜 그 동안 통 놀러 오시지 안았어요? 좀 들어오셨다가 가세요. 아니 어디 아프세요? 얼굴빛이 아주 나빠요. 오빠는 30일 날까진 꼭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냥 가시겠어요? 오빠 오면 다녀가셨다고 전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S의 여동생에게?? 잘 있으란 말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K는 급한 걸음으로 돌아선다. 야단났다. 괜히 청량리까지 왔다. 시간과 버스비만 달아나고 말았다. 가만있자. 요 근처에 아는 사람이 없을까? 부지런히 골목길을 나오면서 K는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돈을 꾸어 줄 사람이 없을까 하고 기억의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꺼내 놓고 헤져 본다. 오, 있다 있다. 홍릉 쪽으로 빠지는 길가에 고향친구 R이 레코드 상점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들은 지난 여름이니까, 자아. . .

4시 55분, 팻 분의 음성 자체가 겨울 같다. 이놈의 노랫소리만 들으면 한여름에도 울컥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 괜히 스잔해 지고 괜히 흥청대는 느낌을 받게 된다. K는 비닐 의자에 앉아서 R이 손을 호호 불어가며 조금 전에 손님이 부탁하고 간 라디오를 수리하기 위해서 뜯고 있는 꼴을 보고 있다. 이 추위에도 해진 작업복밖에 걸치지 않은 R이 가스 중독 같은 건 나 모른다는 듯이 콧구멍만한 상점 안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가끔 손발을 쬐고 있는 걸 보고서야 차마 돈 예기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R을 대신하여 전축 위에 애꿎은 뱃 분만 계속해서 올려놓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너 이 기술 언제 배웠니?”

얼어붙은 손으로 망가진 라디오를 만지고 있는 R을 보며 K가 붇는다. R은 손등으로 콧불을 씩 닦으며,

“군대 있을 때 무선 기술을 배웠거든.”

장하다, 장해. 하고 진심으로 K는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어서어서 돈을 벌어서 내가 궁할 땐 돈도 좀 벌려 줄 수 있는 신세가 되기 바란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K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판자벽을 사이로 하고 있는 옆 상점에서 땡땡땡땡땡 다섯 시를 알린다. K의 콧등이 이상하게 시큰해진다. 종로 2가, ‘뮤직 홀 고고고’ 앞으로 그 여자는 시간을 지키느라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겠지. 나도 이젠 그곳으로 가 봐야지. 다만 돈을 못 구했다는 사실밖에 내가 그곳엘 가는 걸 막을 건 아무것도 없지.

“수고해라, 다음에 또 놀러 올께.” 말하면서 K는 일어선다.

“가만 있어 봐, 이거 후딱 고치고 나서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하자야.” 고향 친구가 진심으로 K을 붙든다.

“종로 2가까지 한 이십분 걸리겠지?”

중얼거리면서 K는 마지막으로 연탄불에 손을 쬐고 나서 몸을 일으킨다. 구린내 비슷한 가시 냄새가 K의 코를 찌른다.

5시 25분. 종로 쪽은 어지러울 만큼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 ‘뮤직 홀 고고고’가 저만큼 보이는 곳에 이르자 K는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틈으로 뮤직 홀 입구 근처를 살핀다. 얼핏 그 여자의 빨간 스카프가 눈에 뜨인다. 이거 어떻게 하지? 무의식적으로 손은 교복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십 원짜리가 한 움큼 잡힌다. 한 움큼이라야 빤하다. 배 원짜리 하나 있던 데서 버스를 두 번 탔으니까 90원이겠지. 어떻게 한다?

그럴듯한 생각이 난다. K는 가까운 곳에 있는 주류 도매상 안으로 들어선다.

“소주 한 병 주세요.”

40원을 주고 소주 한 병을 받아 들자마자 그 자리에서 병마개를 따고 들이키기 시작한다. 병을 입에서 떼었을 때는 벌써 취해 있다. 자, 이젠 가 보드라고. K는 용감하게 뮤직 홀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며 동시에 대사를 외기 시작한다.

“고향친구를 만났어. 정말 몇 년 만이지. 청향리에서 레코드 상점을 하고 있대. 꼭 놀러오라고 붙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한잔하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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