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6(화)
<선비들의 지혜를 찾아서>/박제가의  
<한국의 전설과 설화/선조들의 지혜를 찾아서/2017년 12월>>


수로를 개척하고 배를 만들어 무역을 적극 추진해야

박제가(1750-1815)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그의 주장대로 수로를 발견하고, 배를 건조하여 무역을 적극 추진하였드라면 근대화가 한 세기는 빨라졌으리라는 것이 현대 학자들의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면적이 크지 못하고 국민이 또한 가난하다. 주로 힘쓰는 것은 농업인데 그것도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상업, 공업이라고 하는 것도 보잘것이 전혀 없다. 재정이 넉넉하고 모든 생산품이 번성하기를 바라면 무엇보다 먼저 외국과의 통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대체로 백대의 수례가 싣는 중량이 하나의 배를 당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천리길을 다니는 것도 수로로 만리를 가는 배를 따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상하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수로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다. 서쪽으로는 대륙이 6백여리 밖에 접해 있고 남쪽에는 오 나라, 초 나라가 서로 바라보며 지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송 나라가 고려와 통상할 때에 명주서 7일만에 예성강에 착륙하게 되었으니 멀지 않은 거리이다.

그러나 이조에 와서는 4백년 동안에 외국과의 통상이 한번도 없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하면 부끄러워 숨고? 또 우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성이 그런것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적기 대문에 괴이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은 공포가 많고 혐의가 많아 기풍이 약하고 식견이 얕다.
일찌기 황타선이라는 배가 표류하여 남해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배를 그대로 사용해 왔다. 1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것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본다면 다른 것은 열거할 필요가 없겠다.

금포, 종이 등, 쓰다가 부족한 것이 있을 때에는 한번 통상만 하면 좋은 비단과 좋은 종이를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까지도 왜인들은 중국을 통하지 못했다. 그때에는 언제나 우리ㅣ나라를 통하여 연경에서 실을 무역해 갔다. 우리는 중간에서 그들의 이익을 소개했을 뿐이었다. 왜인은 우리를 통하여 무역하는 것이 이익이 많지 않은 것을 깨닫고 직접 중국과 통상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과도 통상을 시작했다. 거의 30여 나라에 가가왔다. 그중에는 한어에 능통한 자가 있어 중국의 벽지어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하에서 진귀하다는 물품과 중국의 골동 서화가 물밀듯 장기도에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다시는 우리에게 청하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수신사가 중국에 갔을 때다. 무슨 글을 쓰면서 우연히 중국적을 찾았다. 그들은 대뜸 중국먹을 가져다 주었다. 이튿날 수신사는 거리를 나서 보았다. 그가 가는 길은 모두 붉은 벽돌로 깔려져 있었다. 그 이튿날도 역시 어제와 같았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과장과 긍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국민이 모두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다른 사람에겍 양보하는 면이 없음을 볼 것이다.

이제 통상을 하려고 들면 왜노들이 시기하고 떠들며 인국의 사정을 엿볼 것이다. 안남, 유구, 대만 등지는 교통이 험하고 또 길이 멀어 통래하기가 매우 어렵다. 단순한 중국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백여녀 동안 평화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으며, 또 우리를 순한 국민으로 대해 오는 터이니 좋음 말로 중국에 사정하여? “오늘날 일본, 유구, 안남, 서양 등의 나라가 다 통상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중국과 통하여 그들과 같이 복리를 도모하고 싶다”고 하면 그들도 의심하지 않고 허락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이 불여의하게 되면 국내의 공인들을 모집하여 당제를 모방하여 먼저 배를 제조해야 할 것이다.

요즘 다나라 선박이 황해도에 온 적이 있다. 그들은 4월이 되기만 하면 배를 타고 와서 해삼을 따가지고 8월이 되면 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금하지 않고 있다. 그처럼 금하지 않을 바에야 시장을 열고 뇌물도 많이 주면 그들의 선제를 배우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날에 표류의 경험이 있는 대청, 소청도의 섬사람들을 모집하여 수로를 통하여 중국의 해상과 손을 잡고 한 해에 십 여번씩 무역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중 한 두번은 라, 충청, 경기의 해협에 오게하여 수비를 얻게 하고, 배에 올라서 물건을 서로 바꿀 때에 떠들거나 무규칙한 것을 막아 외국인에게 조소를 당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선주를 후대하여 고려 때와 같이 빈객의 예로써 대하면 저들도 자유롭게 왕래하여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기술을 배워 안묵을 넓혀 천하가 과연 얼마나 큰가를 알고, 우물속 개구리 신세를 면하면 지대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한낱 물물을 교역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찌기 외국상선 몇 척을 통하여 전라도민의 빈궁을 면해 보려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다면 토정의 선견은 우리로서 따를 수 없을만큼 높다. “엣 사람의 생각이 우연히 내 생각과 부합한 것이었다.”는 시전(詩傳)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여기서 중국만을 얘기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점차로 국력이 나아지면 차례로 외국과 통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다
(北學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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