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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5(금)
선비들의 지혜를 찾아-계주문(戒酒文) 정 철  
<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7년 4월>

계주문(戒酒文) 정 철

나는 대체로 술을 좋아한다. 그 원인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심신(心身)에 불평이 있어 마시는 것이고, 둘째는 어떤 감흥으로 인해 마시는 것이며, 세째는 손님을 대접하느라고 마시는 술이다. 그리고 네째는 남이 권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마시는 술인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의 관계로 인해 불평이 생길 때에는 이해하면 될 것이고, 어떤 사물에 대해 감흥이 있을 때에는 노래나 시를 읊으면 될 것이다.
또 친한 친구가 왔거나 어려운 손님이 왔을 때에도 자기대로의 정성과 친근만 베풀면 그만이겠고, 보통 술자리에서 지나치리만큼 권하는 이가 있다하더라도 자기의 주관만 뚜렷하면 흔들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습관을 기르지 않고 차마 그럴 수 없다는, 또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옅은 관념에서 끝내 소신을 관철하지 못하고 일생을 망치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까닭인가?

나는 조용한 생활을 해 보려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상감으로부터 다시 관직에 오르라는 은지(恩旨)를 무려 다섯번이나 받았다. 마지못해 금년 봄에는 서울로 올라가 아주 벼슬에서 휴퇴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리기까지에 이르렀다.

사람이 한번 산림속에 묻혀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으면, 의당 종적을 감추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외면으로는 산림에 묻힌체 하면서 행동엔 전혀 변화가 없다. 뿐만아니라 언어에 대한 실수는 더 많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천만 가지의 시곡(邪曲)과 망령된 일이 모두 술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것이다.

술을 마셔 취했을 때에는 멋모르고 일을 저지르다가, 술이 깨었을 때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얌전하다. 그것은 한 가지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취했을 때의 그 광대를 본 사람이 언제든지 있다. 이때 그 사람이 취했을 때 저질렀던 일을 얘기해 준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다가 , 만약 그 사실이 밝혀지면 수치를 참지 못해 곧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생각은 오늘에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내일도 모래도 계속 심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회한은 산더미같이 쌓인다. 청소해 버리고 싶어도 청소할 여가가 없는 것이다.

친절한 친구들은 이와 같은 꼴을 보았을 때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동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연한 사이엔 침을 뱉고 도망간다.

이같은 천명(天命)을 더럽히고 기강을 모독하는 일, 명교(名敎)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해독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달 초하룻날에 가묘(家廟)에 들어가 사배(辭拜)를 올리고 집을 나섰다. 강을 건너려는데 나를 환송나온 사람들이 배에 가득 했다.

뱃전에 앉아서 멀리 서울을 바라본다. 지나간 일이 하나하나 회상된다. 마치 도둑질을 하려다가 주인에게 쫓겨 겨우 칼을 모면한 사람이 대낮에 인간을 대한 것처럼 두렵고 어줍어 몸둘 곳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죄진 사람이었다. 말을, 행동을 삼가지 못해 지은 죄인이었다. 그 술 때문에 저지른 죄였던 것이다. 그때에 하향(下鄕)하면서 나는 이 강을 건넜다. 다시는 나가지 않고 은퇴하리라 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을 또 건너게 되었다. 목멘듯한 물소리는 역시 나를 경계해주고 있다. 나는 이 물을 보는 순간마다 선(善)의 마음이 발작하고 있다.
조용하기 어려운 것은 <마음>이고 상실하기 쉬운 것은 <뜻>이다.
마음이여 ! 뜻이여! 누가 너를 통솔하더냐? 주인옹(主人翁)은 항상 반성하라. 만일 반성하지 못하면 다시 이 강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송강집(松江集)에서
*정철(鄭澈,1536 ~1594)은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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