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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화)
선비들의 지혜를 찾아-허 균의 호민론(豪民論)  
<늘푸른나무/문화산책/2017년 1월>

호민론(豪民論)-허 균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홀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다. 이 백성은 물보다도 불보다도 더 무섭고, 호랑이와 사자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웃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맘대로 이들을 천대하고 혹사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대체로 사색을 깊이 하지 않고 순순히 흘러간 대로 법을 쫓아 웃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항민(恒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백성들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는 백성들이다.

그리고 살이 닳고 뼈가 망가지도록 애써 만든 재산을 갈취당하고 혼자 우는 백성들이 있다. 또 그것을 갈취하려는 자들을 위하여 날뛰는 자를 미워하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웃사람을 원망하는 백성, 곧 ‘원민(怨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원민도 그렇게 무서울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호민(豪民)’이 있다. 이 호민은 세상에 불만을 품고 인적도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춘다. 하지만 영원히 감추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소원을 풀어 보려고 노리고 있는 백성들인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무서운 백성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생활상태를 살핀다. 그리고 나라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꼶은 데를 발견했을 때 불현듯 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밭이랑이나 논두렁 위에 올라서서 한번 크게 소리를 친다. 그러면 저 원민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여든다. 공모 한번 하지 않고도 일은 제대로 진행된다.

이때엔 순하기만 하던 항민들도 이들과 호응을 한다. 그들은 호민이나 원민의 뜻대로 되기만 하면 조금이라도 편할까 하는 생각에서 삽과 호미를 들고 모여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도한 책임자들의 목을 베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진(秦) 나라가 망할 때 진승과 오광이 있었다. 그리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웠을 적에는 황건적이 있었고 당(唐)나라가 어지러웠을 적에는 황소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호민일 것이다. 이들이 일어나기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두가 백성을 너무 혹사하고 착취하여 제 배만 채우려고 하다가 기회만 노리고 있던 호민의 눈을 가리지 못했던 데서 생긴 것이다.

하늘이 목자(牧者)들을 이땅위에 보내 백성을 부양하게 한 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음흉한 욕심만을 채우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진, 한과 당의 멸망이 당연한 것이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는 땅이 넓지 못하고 인구가 적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게으르고 속이 좁다. 기개와 절개도 없다. 그러므로 정치적 혼란이 있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민으로 인해 정부의 걱정이 되었던 일은 없었다. 다행한 일이라면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려 때와 시대가 또 다르다. 고려 때에는 백성을 위한 제도가 오늘과 달라 모든 이익을 백성과 함께 했다. 상업하는 사람도, 공업하는 사람도 동등한 혜택을 입었고, 그리고 수입을 보고 지출을 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항상 여유있는 곡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만일 어떤 병란(兵亂)이 발생하면 상부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난을 평정했었다. 그러다가 말기에 와서는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 . .

현대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다. 변변치 못한 제도와 약소한 백성과 땅덩이를 가지고 귀신을 받드는 일이나 웃사람을 섬기는 형식을 중국과 같이 하고 그리하여 백성들은 오분(五分)의 세금을 정부에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이 세금이 제대로 상납되지 않고 있다. 중간에서 농간하는 무리가 욕심대로 사복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정부의 수입은 실상 일분(一分)정도 뿐이다.

백성은 백성대로 고생을 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여곡(餘穀)이 없다.

그리하여 저축이 없는 정부에서는 일년에 두번씩 세금을 받기도 하고 탐관오리들은 이것을 기화로 하여 있는대로 탈취해 버린다. 백성들은 공수로 울고 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악랄한 일이냐. 기강이 문란하다는 것은 어느 겨를에 말할 수도 없다. 이러므로 백성들의 원성은 고려의 말기보다도 더 드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웃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것을 바로 잡을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견원과 궁예같은 사람이 우리에게도 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은즉 원망을 참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죽은 것처럼 있으리라고 믿어서는 안될 일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 백성의 목자가 된 사람이 백성을 무서워할 줄 알고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다면 적이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惺所覆와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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