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예술-토기기마인물형 주자(土器騎馬人物型 注子)  

<늘푸른나무/명화감상.2014년10월>

토기기마인물형 주자(土器騎馬人物型 注子)


국보 91호
신라 6세기 초
높이 24.0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국의 미를 들어내는 예술품들 가운데는 회화 외에도 공예품들이나 건축물들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려 청자나 이조 백자들은 한국의 미를 잘 들어낸 공예품으로 옛부터 선조들이 애끼고 자랑하던 공예품들이다. 이달부터는 공예품으로 눈을 돌려 그 시대의 특성을 지닌 공예품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경주인근에서 집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던 인부들이 금관을 발견하였다. 당시 언론들은 ‘동양의 투탄카멘’이라고 대서특필하면서 그곳을 ‘금관총’이라 불렀다. 이 일대에는 신라시대의 큰 고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공사장에서 우연히 금관을 발견하면서 훼손되기 전의 무덤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당시의 고고학자들이 총독에게 신라시대의 장례관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분묘를 발굴하도록 청탁하여 분묘들 가운데 일부가 훼손된 금령총과 식리총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금관총에 이어 금령총에서 다시 금관이 나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 금관이외에도 금제 허리띠, 금귀걸이, 긴 칼 등이 나왔고 무덤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관찰이 가능했다. 시신 동쪽에는 부장품을 넣은 작은 상자가 함께 매장되어 있었는데 ‘토기기마인물형주(전)자’(土器騎馬人物型 注(煎)子)는 이 상자 속에서 발굴되었다.

상자속에서는 두 개의 말을 탄 사람들의 모형을 만들어 구은 토기기마인물형 조각품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단지 말 탄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각품이 아니라 말등에는 깔대기 같은 구멍이 있어 액체를 넣을 수 있고 말 가슴엔 대롱이 있어 액체를 따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말 내부는 비어있어 240cc정도의 액체를 담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데 쓰던 注子 또는 주전자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관리가 번거로워서 장례의식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무덤에 넣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장식용으로 만들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만들기도 어렵고 사용하기도 불편한 동물의 모양으로 주자를 만든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 피로 제사를 드렸는데 점차로 이런 동물의 모양을 만들어 제사에 사용할 술을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하필 말의 모양일까? 당시로서는 말이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했지만 말이 죽은사람을 무사히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옛 무덤에서는 말과 관계된 것들이 많이 나왔는데 말의 그림이 그려져 있던 천마총의 천마도를 위시하여 말모양의 신라시대 토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토기기마인물형 주자-주인상으로 의관이 정제되어 있고 장신구들이 아주 고급스럽게 만들어져 있다.



상자속에서 나온 '토기기마인물형 주자'는 조금 큰 것(뒤에 놓인 것)과 작은 것(앞에 놓인 것) 두개인데 큰 것은 말 탄 사람의 의관이 정교하게 정제되어 있고 앉은 모습도 반듯하며 말의 장신구들이 아주호화스러운데 비해 작은 것은 머리에는 모자도 없이 상투같은 것이 그대로 뻗어 있으며 상의도 벗은 상태이고 말의 장신구들도 큰 것에 비하여 무척 단순하게 되어 있어서 분명히 구별된다. 그래서 큰 것은 ‘주인상’, 작은 것은 ‘하인상’이라고 부른다. 하인상은 또한 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고 상자의 앞자리에 놓여 있어서 하인이 방울을 들고 주인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보아 무방할듯 하다.


토기기마인물형 주자-하인상으로 주인상보다 작을뿐 아니라 장신구들의 무늬들이 덜 세련되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토기기마인물형 주자 주인상’을 자세히 보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 탄 이의 모자를 연결한 끈부터 눈, 코,입의 표현, 말안장의 띠고리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바지의 격자무늬는 갑옷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신발은 끝이 경쾌하게 말아 올라간 형태다. 말은 오늘날의 자동차와 같이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세밀하게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였다.

묻힌 사람이 금관을 쓰고 칼을 허리에 찬 것으로 보아 왕족의 남자인 것이 분명하고 허리띠가 짧은 것으로 보아 어린아이가 아닌가 생각되어 어쩌면 일찍 세상을 떠난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이 토기가 만들어진 때를 기원후 6세기 경으로 추측하는데 이때는 신라의 성장이 본궤도에 올라 거대한 무덤들을 축조하면서 국운이 활기를 띄던 시대였다. 현세의 삶이 내세로 이어진다는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신라인들은 국력이 강해지자 고분을 만들고 부장품들은 만드는데 많은 힘을 기울여 세밀한 예술성을 간직한 공예품들을 남겨 놓았다.

(해설 김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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