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목)
새커거위아(Sacagawea,c.1788-1812)-인디안 통역자이며 진정한 안내자였던-  

<늘푸른나무/인물로 배우는 미국/2017년 11월>

새커거위아(Sacagawea,c.1788-1812)
-인디안 통역자이며 진정한 안내자였던-

미국 역사가운데는 다양한 종족들이 백인들을 도와서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나름대로 공헌들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북미대륙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 인디언들 가운데서 여성을 꼽으라면 별로 떠오르는 인물들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그중에 하나가 디즈니영화로 잘 알려진 전설같은 인물 포카혼타스다. 죤 스미스 대위가 이끄는 첫 번째 영국정착민이 1607년 버지나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 인디안 추장 포하탄(Powhatan)의 딸이었던 포카혼타스는 인디언들에게 잡혀온 죤 스미스 대위를 풀어주도록 하는데 큰 몴을 하였고 후에는 백인들에게 잡혀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담배재벌 죤 롤프(John Rolfe)와 결혼하여 북미대륙에서 첫번째 인종간의 결혼을 성사시킨 기록을 남겼다.

포카혼타스의 이야기가 17세기 초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어울린 전설같은 이야기라면 이번에 소개하는 새커거위아 이야기는 분명한 기록들이 전해져 오며 미국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인물이다.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외교적인 교섭에 의해 북 아메리카 대륙의 중남북부 일대, 전 대륙의 거의 3분의 1 지역을 매입하는데 성공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스 대위와 클락크 대위가 이끄는 탐험대를 조직하여 새로 매입한 광대한 지역을 탐사하고 지도를 만들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외에도 제퍼슨은 북 아메리카 대륙 내지(內地)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주민 인디언 부족 또는 국가들을 접촉하여 교역을 하는 한편 동부에 있는 미합중국의 존재를 알리고 통치권을 선포하면서 그들과의 교류를 시도하도록 하는 외교임무까지도 부여하였다

1804년 5월 14일 이 탐험대는 세인트 루이스 근처의 캠프 두보이스를 출발하여 대장정의 길에 나섰다. 루이스의 차탐험대가 Hidatsa근처에 도착하여 1804-05년 겨울을 지내려고 준비하면서 원주민들과의 통역을 담당하고 봄에 미주리 강까지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했는데 이때 선발된 사람이 챠본느(Charbonneau)였다. 그의 아내 새커거위아가 쇼손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노스 다코타에서 태평양까지 수 천 마일을 이 원정대와 같이 탐사하면서 루이지아나 지역 일대에서의 자연탐사의 막중한 임무와 함께 원주민들과의 문화적인 접촉을 수행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쇼손(Shoshone)의 렘하이(Lemhi) 여인 새커거위아(Sacagawea)이다.

미국의 여러단체들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동상들을 만들었으며 미국정부는 탐험대 군인들에게 준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2001년 빌 크린튼 대통령의 이름으로 그녀를 미국군대의 명예 상사로 추서하기도 하였다.

새커거위아는 지금의 아이다호주 샐몬근처에 있는 렘하이 쇼손 나라(Lemhi Shoshone)에서 태어났다. 1800년 그녀가 12살쯤 되었을 때 그녀는 히다차(Hidatsa)족과의 싸움 끝에 다른쇼손 부족들은 죽고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납치되어 그녀는 현재의 노스 다코타 주 와시본에 있는 히다차로 끌려 갔다.

그곳에서 13살 때쯤 그녀는 그동네에 살고 있던 퀘벡에서 온 사냥꾼 차본느(Toissaint Charbonneau)에게 팔려가 합의 없는 결혼을 하였는데 차본느는 다른 쇼손족 젊은여자를 종으로 사서 두 여자를 모두 아내로 신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인 차본느(Chabonneh)와 그의 인디안 아내 새커거우아가 통역으로 탐험대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새커거우아는 임신중이었으며 탐험중 2월에 아들 Jean Baptiste를 출산하였다.

1805년 8월에는 탐험대가 쇼소 족들과 조우하였는데 사카가위아를 통역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하다보니 쇼소족의 족장이 그녀가 12살 때 납치되어 가면서 헤어졌던 친 오빠였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덕분에 럭키산맥을 넘는데 필요한 말을 비롯해 안내자 등 필요한 지원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고 그러한 인연으로 다른 인디안 족들과의 문화적 교류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번은 배가 전복했을 때 사카가위아가 잽싸게 물에 들어가 귀중한 루이스와 클락의 일기와 기록들을 구해내어서 이에 감탄한 대장들이 그곳을 사카가위아 강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사카가위아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인디안 족들과의 좋은 협상자였으며 탐험대에 그녀가 함께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탐험대의 의도가 평화라는 것을 과시하여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드라면 탐험대가 그만한 성과를 거두었을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클락 대위는 “이 인디안 여인은 여기의 인디언들에게 그들이 전쟁에는 여자를 데리고 가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전쟁의 의도가 전혀 없음을 과시하였고 모든 인디언들과의 화해를 촉진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탐험임무가 끝난뒤 차본네와 사카가위아는 히다차에서 3년을 머물다가 클락 대위의 초청을 받아들여 1809년에 미조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로 옮겨 정착하였으며 1812년 확인되지 않은 병으로 1812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구전가운데는 사카가위아는 1812년에 죽지 않고 남편 체본느와 헤어져서 대평원을 건너 한 코만치 족과 결혼하여 1860년 와이오밍에 있는 쇼손 족 부락에 와서 살다으며 1884년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젊었을때 그녀가 뿌렸던 인종을 초월한 화해와 협조와 헌신의 정신이 아직도 북미대륙의 대평원에 살아 있어 신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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