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로 배우는 미국   ▒  

2017/8/3(목)
죤 브라운 (1800-1859)-악마인가? 천사인가?-  

<늘푸른나무/인물로 배우는 미국/2017년 3월>

죤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
-악마인가? 천사인가?-

노예문제는 미국이 지워버릴 수 없는 원죄로 노예문제만 나오면 미국은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노예제도의 철폐를 위해 노력한 위대한 대통령이요 미국 역사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노예제도의 철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들먹이며 미국의 위대함을 내세우지만 인간들을 짐승들과 같이 돈으로 사고 팔고 노예로 부리면서 지금의 미국의 부(富)의 기반을 닦아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노예문제는 미국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농경중심사회에서 부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노예제도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수 백년동안 견지해온 백인중심의 북미대륙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며 인간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함께 농경중심에서 산업화 사회로 이전하면서 노예제도의 절박함이 완화된데도 한 요인이 있다 하겠다.

남북전쟁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노예해방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기여가 있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우선 10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위시한 비참한 전쟁희생자들을 비롯해 노예해방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국민의식으로 승화시키는데 한 몴한 많은 사람들-엉클 톰스 캐빈을 쓴 스토우 여사 같은-등, 그리고 남북전쟁의 불이 당겨지기 전까지 여러 방법으로 노예상태의 흑인들을 해방시키는데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도왔던 많은 사람들-대부분의 백인들-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아직까지도 그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이 죤 브라운이다. 브라운은 미국 역사상 흔치 않은 과격한 노예폐지론자로 미국에서 제도화 된 노예제도를 타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장전복이라고 확신하였으며 그래서 결국은 사형집행을 당한 인물이다.

1800년 생인 그가 미국사회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56년 캔사스 주에서 소수의 자원자들을 이끌고 노예해방을 위한 유혈폭동을 일으키면서 부터였다. 30대부터 노예폐지 운동에 가담하면서도 평소에 조직화된 평화주의 노예폐지운동가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브라운은 “그들은 항상 말만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행동”이라고 불평하곤 하였다.

1856년 캔사스 캠페인 도중 브라운은 무력사용을 독려하였고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1856년 친노예주의자들의 약탈에 대응해서 5명의 친 노예주의자들을 살해하였는데 이것을 포타오토믹 집단살해사건이라 부른다.

그리고 1859년에는 버지니아 주의 하퍼스페리의 연방정부 무기고를 직접 습격하여 탈취한 무기로 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들이 직접 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도주하다가 결국 지역의 친노예 농부들과 해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버지니아 주에서 반역죄로 기소, 유죄판결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브라운의 기습사건은 남부사람들에게는 노예해방운동이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으며 공화당원들은 남부의 노예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갖게 하었다

브라운의 하퍼스 페리습격사건은 남북의 긴장을 격화시켜 다음해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브라운의 노예찬성론자 습격사건으로 미국사회에는 철학적, 심리적 영향보다 더 직접적인 피부로 느껴지는 남북간의 분열상을 인식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를 단선적인 열성파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그 시대에 가장 통찰력(직관력) 있는 사람가운데 하나”였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데이빗 레이놀드는“노예제도를 죽여 버리고,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민권의 씨를 뿌렸다”고 극찬하였으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수백만의 아메리칸들을 자유롭게 만든 미국인”이라고 하였다.

브라운은 1800년 컨넷티커트 주에서 여덟 자녀의 네 번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조상가운데는 17세기 영국 퓨리탄의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 다섯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 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로 옳바른 생활을 추구하는데 신앙의 초점을 두었던듯 하다. 열 여섯살 때 집을 떠나 회중교회 목사가 될 생각으로 매사츄세츠주의 예비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건강과 재정문제로 중도에 포기한 후 아버지에게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워 자신의 대장간을 세웠다.

20대에 오하이오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였으나 30대에 병에 걸리면서 사업이 기울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를 씻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늘 하던 브라운은 1837년 노예폐지론자인 일리노이주의 편집인 Lovejoy가 살해당하자 “내 생명을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바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였다. 그리고 마사츄세츠 주의 스프링필드로 옮겨서 그곳에서 남부에서 도망해온 노예들을 돕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이때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시인 소로우와도 교분을 나눈것으로 알려졌다.

1850년 대에 들어와서 그는 “죄를 씻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1856년에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노예반대자들을 학살한 캔사스의 노예찬성자들을 난도질해 죽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1859년에는 연방정부 무기고를 습격, 무기들을 탈취하여 흑인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폐지 운동에 투입하려고 직접 참가했다가 붓잡히는 바람에 국가반역자의 주모자로 교수형에 처하여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죤 브라운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죤 브라운의 시체”라는 노래는 다음해에 터진 남북전쟁 때 북군의 행진곡으로 널리 불렸으며 그는 ‘순교자’로 부상하였다.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제도 폐지론자로서의 그의 행동과 전략은 타당한 것이었으며 그는 과연 순교자요, 비젼을 가졌던 영웅인가? 아니면 미치광이요 테로리스트인가? 오늘날까지도 그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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